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김대중 1년, 그늘진 인권현장의 사람들 ⑦ 배상훈(목포결핵병원 비상대책위 위원장)


“결핵에 결렸다는 사실을 알고 한달 내내 아무 말도 못했어요. 결핵환자가 된다는 것은 죽는 것만큼 두렵다는 사실을 알게됐거든요. 그때 난, 내 미래가 너무 두려웠어요.” 배상훈 씨는 결핵에 걸린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다. 전염될까 두려워 달려드는 자식을 껴안아주지 못하고 내치던 사람들, 가족이 있어도 병원문을 나서봤자 갈 곳이 없는 사람들, 형과 동생을 결핵으로 잃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야하는 사람들. 국립목포결핵병원에서 그는 결핵환자들의 아픔을 보았다.


결핵병원 민간위탁 반대투쟁

결핵이 치유된 지금도 그는 ‘국립목포결핵병원 민간위탁반대 환자비상대책위’ 위원장으로 살고 있다. 본래 결핵이란 병이 다시 재발하고 나면 완치가 어려운 병이라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함에도 그는 병원에서 나온 이후 줄곧 서울 농성장과 사무실에서 생활하고 있다. 정부의 국립목포결핵병원 민간위탁 발표 이후 민간위탁 반대를 외치며 살아온 지난 1년. 아직 성치 않은 몸이기에 조금 쉬어도 되련만 그는 투쟁의 길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도망가는 것은 곧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등을 돌릴 때 죽는다는 생각, 채찍질하지 않으면 무너진다는 생각, 그것이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였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만이 이제 8살난 딸 현리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될 수 있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보험에 든 사연

“어머니 손에서 자라는 현리를 보면 편하게 살고 싶은 유혹이 생겨요. 하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 틈이 나면 현리와 보육원에도 같이 가고 <달려라 하니>라는 만화도 같이 봐요. 어려워도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거든요. 현리가 20살이 되면 전태일 영화를 보여주면서 아빠는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결핵에 걸린 이후 그는 교육보험과 상해보험에 가입했다. 자신의 몸이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기에 만약의 경우 혼자 남겨질 현리를 위해 그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 한끼 식사를 고민해야할 만큼 가난하지만 무슨 일을 해서라도 현리를 위한 보험료 납부는 미루지 않는다.


노동운동…결혼…헤어짐…병마

어느새 37살. 23살 때부터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사람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꾸렸다. 심신 장애인으로 태어나 지독하게 말을 더듬고 사람을 만나는 것마저 기피해 학창시절 내내 ‘왕따’로 살아온 그에겐 놀랄만한 변화였다.

7년 동안 노조 교육부장으로 일하면서 자신에게 노동이론을 가르쳐주던 대학생과 사랑에 빠져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행복한 기억보다는 아픈 기억이 더 많았다. 잘 해나갈 수 있을 거라 믿은 결혼 생활은 이론과 생활이 하나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고 현리 엄마를 보낸 아픔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결핵이란 병마가 그에게 찾아왔다.


환자들과의 컴퓨터교실

목포에 내려간 그는 한달 간의 침묵 뒤에 사람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느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자신을 대신하던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의 위에 군림하고자하는 병원. 그는 사람들과 함께 소리를 내고 싶었다. 그래서 컴퓨터 교실을 열었다. 컴퓨터를 살 돈이 없어 자판만 10개를 샀고 젊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환자들의 신문을 만들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병실에서 생긴 우스운 일들이, 회진에 대한 바램이, 음식에 대한 불만이 신문에 담겨졌다. 때론 “근조”라는 단어가 눈물과 함께 실리기도 했다. 12살된 꼬마가 10살된 동생의 보호자가 되어 찾아왔던 일도 있었는데 결국 아이들은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 일을 계기로 환자들은 서로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돈을 걷어 아이들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러한 생활 속에서 목포국립병원의 민간위탁 발표가 났을 때 그는 자신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그의 망막에 새겨진 그들의 삶이 그를 다시 불러일으킨 것이다.


돌아가고픈 공장생활

그는 목포결핵병원의 민간위탁이 철회되는 날까지 투쟁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공장으로 돌아가 노동자로 살면서 노조를 만들어 일하는 사람들이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그가 만들고자하는 세상이 그의 것이, 그가 누릴 수 있는 세대의 것이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이가 들수록 아주 작아지는 날 느껴요.” 더 잘하고 싶은데 잘해지진 않고 문득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너무 자족적인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도 드는 지금 그의 나이는 37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