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요약> 21세기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학술대회

1주제: 동아시아 냉전과 민중


‘21세기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가 지난 21일부터 24일까지 제주에서 진행됐다. 냉전과 미국의 영향 아래 참혹한 인권유린을 경험한 한국, 대만, 일본(본토), 오키나와 등 4개 지역 사무국이 공동주최한 이번 학술대회의 주요 내용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편집자주>.

◆ 오키나와 반기지투쟁과 동아시아의 평화창조
-아라사끼(오키나와대 교수)

종전후 동아시아의 군사요충지가 필요했던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오키나와를 분리해 단독 지배하에 두게 된다.

1952년 발효된 대일평화조약 제3조 아래 오키나와에서는 핵병기의 반입과 전투작전행동이 자유롭고 포령․포고라고 불린 미군명령이 법 전체에 우선했다. 오키나와는 미국에 ‘병합’된 것도 ‘할양’되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오키나와의 출입지역은 미군에 의해 엄중히 관리되었다.
51년 9월 오키나와에서는 일본복귀운동이 전개됐는데, 이는 오키나와를 미군정 하에 둔 채 독립하려는 일본에 대한 항의인 동시에 대일평화조약에 반대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미군정에 의해 탄압받았고, 운동 조직들도 점차 소멸되었다.

이후 미국의 베트남 개입에 따라 세계적인 반전운동이 야기되자 이 운동과 결부되어 있던 오키나와에서도 반기지투쟁이 고양되면서 미국의 배타적인 오키나와 지배가 곤란하게 되었다. 따라서 69년 11월 일미공동성명에서 미국은 오키나와를 72년에 반환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오히려 72년 오키나와 반환을 이용해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를 집중시켰고, 결국 일본 전면적의 0.6%밖에 안되는 오키나와에 미군기지의 75%가 집중하는 상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95년 가을 미군범죄를 계기로 야기된 오키나와의 평화․인권․자립을 요구한 싸움은 미국의 패권주의적 세계전략에 정면으로 대립한 것이다.

남북한의 평화적 공존․통일은 오키나와 미군기지, 주한 미군기지의 소멸․철거를 위한 가장 유리한 조건도 될 수 있다. 역으로 미군기지의 소멸․철거를 요구하는 운동은 민중이 주체가 되어 남북한의 평화적 공존,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평화창조로의 길을 여는 것에 연결된다.


◆ 일본과 미국의 중국전략- 대만 백색테러를 중심으로
- 임서양(대만대표단 단장)

미국과 소련의 대항이 점차 두드러지면서 ‘어떻게 하면 중국이 소련의 부속품이 되는 것을 막을 것인가’하는 것이 미국의 아시아 전략의 새로운 초점이 되었다. 미국국가안전위원회에서는 대만과 대륙을 갈라놓음으로써 ‘대만이 공산당의 수중으로 떨어지는’ 것을 저지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나눴고, 또한 ‘대만위치미정론’ ‘대만독립론’이 제출되기도 했다.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대 중국정책엔 대변환이 이뤄졌다. 그들은 대만을 다시 ‘적색중국’에 반대하는 군사거점으로 삼고 계속 장개석 정부를 도와 반공정책을 추진했다. 각종 군사․경제원조가 재개되고 제7함대가 대만해협으로 급파되어 대륙 홍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장개석 정권은 이 속에서 안정을 이루고 삼엄한 백색테러 공산척결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함으로써 이 최후의 기지를 공고히 했다.

대만 50년대의 백색테러는 국공내전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30년대 대만의 좌익 역사전통과 미소대항의 국제정치적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 미국의 한반도전략과 조선의 분단- 4․3항쟁을 중심으로
- 강정구 (동국대 교수)

4․3항쟁에 대한 미국의 초토화작전이나 반인륜적인 살상행위는 미국의 세계 지배전략과 조선의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역사지향과의 충돌에서 비롯된 구조적 산물이다.

해방공간에서 조선사회에 외세개입이 없었다면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필연이었다. 이는 이미 1년이상 반공이데올로기 선전이 진행된 후였던 1946년 8월 미군정청의 여론조사에서 일반시민의 70%가 사회주의를 선호한 데서도 드러난다.

미국은 45년 4월 이후 루즈벨트의 헤게모니전략(상호협조 아래 미국의 주도적 이익을 확보하는 전략)에서 트루만의 지배전략(주도국가의 일방적 이익을 위해 종속국가나 비주도국가의 이익을 무력․강요를 바탕으로 희생시키는 전략)으로 전환한 뒤, 조선전략 또한 공동점령과 다국적신탁통치안을 내용으로 하는 헤게모니전략에서 분할점령 등의 지배전략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전략 아래 미국의 남한 점령정책은 친일파의 보호․육성과 미국이 남한을 직접 통치하는 군정의 실시였다. 이는 친일․민족반역자들 외에는 미국의 지배전략에 호응할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며, 조선의 혁명적 상황을 분쇄하여 그들의 세계전략구도에 강제 편입시키기 위해서는 무력과 통치력을 독점하는 군사정부를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3항쟁은 5․10 단독선거를 분쇄해 민족분단을 막고 미제국주의를 몰아내 민족자주통일국가를 수립하려는 민족항쟁이었으며, 미군정의 주구인 경찰, 서북청년단 등 테러단의 인민수탈과 폭압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을 추구하는 인간해방투쟁이었다.

조선의 분단은 미국이 반인륜적인 만행을 통해서라도 그들의 일방적인 이해관철을 추구하는 지배적 세계전략의 결과물이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조선인의 역사주체성은 기어코 무력투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의 한 형태가 바로 4․3항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