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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조세형 씨 최후진술 요지>

동료 죽음 알리려 2개월간 ‘난동’ 준비


검사는 청송교도소 재소자의 1/3이 독거를 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엄정독거와 일반독거를 혼재시킴으로써 본질을 덮어버리려는 것이다. 청송교도소 수용인원 1천-1천1백명 가운데 70%는 낮에 작업을 나가는 ‘출역수’들이고, 30%는 일이 주어지지 않은 ‘미지정’들이다. 출역수들은 전원 혼거를 하고 있고 미지정도 대부분 혼거를 하고 있다. 미지정 재소자 가운데 1/3(1백명 미만)만이 독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독거라 불리며, 이는 오히려 재소자들이 원하는 바다.

나는 15년간 엄정독거를 한 까닭에 청송교도소의 건물이 어떠한지 교회가 어디 있는지 조차 모른다. 노태우 정부의 ‘범죄와의 전쟁’ 때 강력범 2백여 명이 청송교도소에 들어와 엄정독거를 당했는데, 1년에 여섯명이나 자살하고 정신이상자가 속출했다.

15년간의 징역을 마치고 감호자 신분이 되어 청송제1감호소로 이감됐다. 그런데, 감호소측은 5사동에 감방을 따로 만들어 나를 혼자 수용했다. 감방의 철창 뒤에는 철판을 댔고, 최신 CCTV를 설치했으며, 나만의 전용운동장을 만들고 밥도 교도관이 직접 갖다주는 등 철저히 다른 감호자들과의 접촉을 차단했다. 감호소의 생활은 징역보다 더했다.


엄정독거 근거대라

1년마다 바뀌는 청송교도소의 소장에게 엄정독거의 근거를 대라고 항의해 왔다. 그러나 이들은 “조세형 네가 서울구치소에서 도주한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네가 청송에서까지 도주하려고 3일간 난동을 부린 것은 용서할 수 없다”며, 녹음기처럼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83년 내가 청송으로 이감됐을 때 치질에 걸려 있던 70세 노인이 더운 물 한 그릇만 더 달라고 했다가 손자뻘되는 교도관에게 사정없이 두들겨 맞는 일이 있었다. 또 사동 내 4미터 폭의 통로에는 양쪽으로 50센티미터 너비로 노란 선을 그어 놓았다. 거기선 네가지의 규칙이 있는데, 첫째, 재소자들은 무조건 좌측통행을 해야 하며, 둘째, 고개를 숙이고 걸어야 하고, 셋째, 재소자들끼리 통로에서 말을 주고받아선 안되며, 넷째, 노란선을 벗어나 걸어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를 어길 경우엔 무릎을 꿇리고 가차없이 얼굴과 머리를 난타하는 것이 예사였다. 다시말해, 청송은 생길때부터 폭력, 오로지 폭력 뿐이었다.


치외법권 지대, 오로지 폭력 뿐

그러나, 내가 수용된 7사동은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보안과에서는 7사동을 건드리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7사동에 수용된 재소자 가운데 안중근이라는 사람은 폐쇄공포증에 걸려 있어서 방안에 갇혀 있을 때마다 자해나 발광을 해 수차례 보안과에서 두들겨 맞곤 했다. 그러나 방에 돌어오면 또다시 소란을 부리는 악순환이 계속되자 교도소측은 안중근에 대해 두 손을 들었다. 이후 교도소측은 안중근에 대해서만 방을 개방해 안중근은 종일 복도를 자유로이 왔다갔다 하고 밤이 되어야 들어가 자곤 했다. 교도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 교도관들은 희생양을 찾았고 그가 바로 박영두였다. 박영두는 신체검사에서 고혈압 판정을 받은 이후, 매일 의무과에 약을 타러 다녔었다. 그런데 ,84년 10월 12일 그날따라 교도관들은 박영두를 의무과에 보내주지 않고 계속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박영두가 교도관과 옥신각신했고, 그것이 함정이었다.

교도관 박승호는 “담당에게 말을 함부로 했다”며 트집을 잡았고, 오후 6시가 되자 교도관들이 몰려와 박영두를 수갑에 채워 데려갔다. 그때 안중근도 함께 끌려갔다. 1시간 30분 뒤 안중근이 돌아왔는데, 6-7명의 직원이 박영두를 수갑과 포승으로 손․발목을 묶고 온몸을 활처럼 휘어버린 채 메고 돌아다녔다. 안중근은 박영두가 세 차례나 기절할 정도로 폭행을 당했다고 말했다. 박영두는 활처럼 묶인 상태로 방에 넣어졌고, 들어가자 마자 “죽겠심더”하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교도관들은 이를 묵살했다. 그후 박영두는 “차라리 죽이라”며 절규했고, 밤 11-12시 무렵부터는 “어머니, 나 죽심더. 살려주이소”라고 외치다 사망했다.


동료 죽음 고발하러 3일간 난동

박영두의 시체가 밖으로 나간 뒤, 7사동 재소자들은 사건이 은폐되면 실력행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박영두의 사인을 ‘심장마비’라고 판정했고, 검사는 교도소 말만 듣고 조사도 하지 않았다. 박영두의 시신은 가족에게조차 보여주지 않은 채 화장됐고 사건은 종결됐다.

이후 교도관들은 “입 다물어라. 그러면 징역살이를 편하게 해주겠다”고 회유했다. 이에 나는 “동료의 죽음을 이용해 편한 징역살이를 하느니 차라리 칼을 물고 죽겠다”고 하니까 교도관들은 “자살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나를 58일간 물품창고에 격리시켰다. 이후 7개월간 이중격리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순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난동’을 생각하게 되었다.

7개월 뒤 원래의 방으로 복귀된 뒤, 교도관들은 7사동의 방을 다 개방하고 마음대로 놀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2개월 동안 ‘난동’을 준비한 뒤, 85년 9월 19일 7사동을 빠져나와 8사동에서 ‘난동’을 시작했다. 3일간의 난동 후 나는 ‘이 정도면 재판에 회부될 것이고, 거기서 박영두 살인사건을 고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교도소측은 형사입건을 시키지 않았고 그때부터 엄정독거가 이루어졌다.

이번 재판이 ‘재범의 가능성’을 판단한다고 하는데 솔직히 나는 별 관심이 없다. 나는 이번 재판이 청송교도소의 무리한 공권력 행사와 인권유린 행위를 털어놓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재판장이 다시 감호소로 돌아가라고 판결하더라도 나는 미련을 갖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