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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시평> 아프리카 추장이 온다고 해도


정권이 바뀌었다. 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시작된 인선이 대충 대충 끝나고 있다. 참으로 멋있는 인사도 있었고, 그 나물에 그 밥 식으로 구태의연한 인선도 눈에 띄었다. 공동정권의 한계 때문일까. 재산증식 과정에 대한 의혹이 제기된 일부 장관도 있었고, 박정희에서 김대중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요직을 차지한 인사도 눈에 띈다. 그래도 김대중 정권에 참여한 사람들은 비록 자민련 출신이라도 좀 낫다. 짧지만 야당생활을 해 본 사람도 있고, 비록 각종 비리에 연루된 탓이지만 옥고를 치르면서 '고초'를 겪었던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진짜 문제는 한나라당에 있다.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어줍잖게 부총재가 된 김윤환. 그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으로 정권이 이어지는 동안 20년 넘게 권력의 주변을 기웃거렸다. 박정희야 졸지에 죽었으니 망자무언이지만, 물러난 전두환은 노태우 편에 서서 자신을 단죄하는 김윤환을 손보고 싶었고, 노태우 역시 김영삼에게 빌붙은 김윤환을 그냥 두지 않겠다고 별렀다고 한다. 아직 알려진 바는 없지만 김영삼도 아마 김윤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회창은 또 어떨까?

서울시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최병렬도 김윤환에 버금가는 전형적인 해바라기 인사이다. 최병렬이 자랑해마지 않는 시장경력을 따져 보자. 그는 성수대교가 무너진 다음 '시설관리' '안전'을 위해 시장이 되었지만, 임기중에 성수대교 참사를 몇배나 능가하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일으킨 주역이 되었다. 매우 운좋게도 서울시장 선거 직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져서 최씨의 범죄가 은폐되었지만, 안전관리라는 지상명령을 수행해야 할 시장이 백화점이 무너질 때까지 그 조짐조차 모르고 있었다면, 당연히 그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극장, 시장, 백화점 등 공공시절의 안전부터 점검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서울시장이 되겠다고 한다. 기가 막힐 일이다. 김윤환, 최병렬만 그럴까.
김대중을 죽이기 위해 서경원, 방양균을 고문했던 정형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해병대장교 출신 이장형을 간첩으로 둔갑시킨 이사철, 경기여상을 설립했으며, 여전히 경기여상의 소유주인 김일윤도 국회의원으로 건재하다. 이게 다 국민(아니, 실은 우리 같은 활동가들이)이 너무 빨리 잊어줘서 생기는 일이다.

며칠전 이종사촌형이 사무실을 찾아왔다. 운동이라고 한답시고, 가족 친척들에게는 한없이 형편없었기에 사촌형과 둘이 앉아 소주잔을 기울인 것은 정말이지 생전 처음 이었다. 피아노 전공으로 국립서울대를 나와서 독일유학까지 했던 사촌형은 '딴따라' 답지 않게 우리 사회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황석영 소설도 죄다 읽고, 박노해의 책은 신간까지 찾아서 읽었단다. 다음은 형의 주정이다.

"야, 근데 말이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때 권력에 빌붙어서 온갖 거 다 처먹은 놈들은 그냥 두어야 하냐. 그놈들이 단순히 권력에 붙어서 저 혼자 잘살고 잘먹었으면 그래도 참을 수 있지만. 국민을 속이고 엄한 사람 잡아다가 고문하고, 족치고, 간첩만드는 일에도 앞장서고, 요상스런 법을 만들어서 국민을 억압하는 일까지 했는데 그냥 두어야 되냐 말이야. 독일에는 말이야 히틀러에 대해서 매우 단호하거든, 근데 말이야 뭐 박정희가 그래도 보릿고개를 넘게 해준 공이 있다고, 독일에는 전범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도 없어요. 인륜에 반한 죄. 뭐 이런 게 한국에는 없어. 광주에서 직접 총 들고 사람들 때려잡은 놈들만 나쁜 게 아니야. 광주 일을 두고 유언비어가 횡행하는데 이런 건 죄다 우리 사회가 선진사회로 가는데 필연적인 일이고, 우리 국민은 현명하니까 이런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않을거라던 교수놈들, 전두환, 노태우 열심히 빨아주던 언론사 놈들, 이런 놈들을 그냥 두고, 국민의 시대가 열리냐? 열릴 수 있기나 하냐.

일제시대에도 그랬잖아. 독립운동은 무슨 독립운동, 이놈들은 일본놈들에게 붙어서 대동아 공영이 어쩌니, 어차피 약소민족이어서 식민지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으니, 영미구축보다는 같은 동양선진국의 통치를 받는게 좋다던 놈들이었잖아. 그런 놈들이니까, 독립운동 빙자해서 미국에서 호의호식했던 영감이 대통령을 해도, 총 들고 탱크 몰고 서울로 진격한 군인이 정권을 잡아도, 그들에게 충성을 다하는 거야. 그런 놈들은 말이야, 일본놈들이 다시 쳐들어와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충성을 서약할 거야, 아니야 그런 놈들은 김정일이가 내려와도 왜 이제 오셨냐고 그럴걸. 아니야 아니야, 그런 놈들은 아프리카 추장이 와서 정권을 잡아도 똑같을 꺼야.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라고.

그런데 말이야, 야 이놈아! 너는 인권운동을 한다는 놈이잖아. 인권운동이란게 뭐냐, 사람 살리자는 거잖아. 그놈들 때문에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 인혁당도 그렇고. 그런데 왜 그런 놈들은 못 때려잡냐. 그런 놈들부터 때려잡아야 역사든, 경제든, 정치든, 도덕이든, 민족정기든 바로 세울 수가 있어요."

아무튼 생전 처음 둘이 앉아 소주잔을 기울인 날, '그놈들' 때문에 무지무지 혼났다.

오창익(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