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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시평> “살아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두 돌 되는 ‘인권영화제’를 위하여-

앞다투어 ‘문화의 옹호자’임을 자처하는 지방자치체들이 대규모 문화축제에 저마다 쏟아붓는 열성과 물량이 엄청나다. 이 가을, <한겨레> 문화면은 이렇게 탄성을 질렀다. “문화축제를 즐겨보세!”

제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어마어마한 관객을 동원했다. 외국에서 초청된 감독들은 한결같이 부천영화제의 성공을 놀라와 했다고 한다. 이제 한달 후로 다가온 부산국제영화제 역시 그 첨단장비를 동원한 화려함으로 작년과 같은 성황을 이룰 것이다.

거대한 두 영화제 ‘막간’에 다소곳이 자리잡은 제2회 인권영화제, 그러나 막판에 접어드는 그 준비가 몹시 힘들다. 개최 예정지였던 동국대학교 측이 제2회 인권영화제를 한달 남겨놓은 시점에서 장소를 빌려주지 않기로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이다. 당장 새 장소를 구해야 하는 절박함에 허둥대는 과정에서 영화제 준비에 연쇄적으로 차질을 낳아버렸다. 정신 퍼뜩 차려보니 남은 기한은 20일! 앞으로 밥먹듯이 밤을 지새우는 일만이 남은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동국대학교에 대한 행정당국의 직접적인 압력은 없었다. 말하자면 ‘자주규제’인 셈이다. 그러나 ‘자주규제’는 진짜 ‘자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 ‘강제’에서 나온다. 누구나 한결같이 말한다. 인권영화제, 취지도 좋고 작품도 좋다. 그러나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을 지는가!?” 나는 우리 사회가 소름이 끼치도록 철저하고 무서운 사회임을 실감한다. ‘문화’의 물결이 온누리에 출렁이는 이 가을에 인권교육을 위한 조촐한 이 마당은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다.

작년, 제1회 인권영화제 관객들이 써낸 설문지는 우리의 ‘보물’로 남아 있다. “내년에는 행정당국의 간섭 때문에 고생하지 않기를…” “내년에는 좀더 넓은 장소에서…” “내년에도 이런 좋은 영화제를…” “내년에는…” 나는 지금 그 관객들에게 미안하다.

우리 나라 헌법은 검열을 금지하고 있다. 검열이란, ‘표현행위에 앞서 행정권이 그 내용을 사전에 심사하여 부적당하다고 판단할 때 그 발표를 금지하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지극히 당연이란 듯이 영상물에 대하여 과해지는 ‘사전심의’는 누가 어떤 궤변을 농해도 헌법에 위배되는 반인권행위임이 명백하다. 인권영화제가 이 사전심의를 거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은 우리의 영화제가 ‘인권’영화제이기 때문이다. 즉 사전심의제도가 존재하는 이상 인권영화제는 ‘불법 영화제’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며, 이것은 인권영화제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헌법에 위배되는 사전심의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권영화제만의 당위는 아니다. 많은 영화인들, 그리고 ‘○○영화제’나 ‘××영화제’를 개최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불법 영화제’는 두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밖에 없는 것이다. 번듯한 극장, 선명한 영상, 물결치는 관중을 가지고 열리는 모든 영화제는 사실상 검열제도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어느 때부터인지 영화제들은 묘한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사전심의를 “피했다”…. 즉 ‘정치력을 발휘’하여 서류상으로만 ‘심의’를 받거나 아니면 출품작 중 일부만 심의 받고 나머지는 일괄 통과 시켜버리는 꾀가 발달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강간을 당하면서, 저항하는 척만 할 테니 진짜로 저항한 것으로 쳐달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봐주기’와 ‘눈가리고 아웅’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제기된 문제 중의 하나가 ‘검열 반대’였다고 한다. 부천영화제에 초청되어 자신의 영화를 검열의 손에 내맡긴 외국 감독들이 부천영화제의 성공을 극구 칭송하는 그 입으로 한국의 검열제도를 비판하는 자가당착은 나의 머리를 마구 어지럽힌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작품이 검열을 받은 데 대한 부끄러움의 흔적은 없었다.

또한 주최측은 심의 받지 않은 영화 <좀비 1>을 돌발상영 함으로써 그 후원기관인 문화체육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으며, 역시 한국의 단편독립영화들을 심의없이 상영하는 ‘반란’을 감행했다. 나는 일단 이 당돌한 반란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천시라는 큰 권력을 등에 업었기에 절대로 처벌 받지 않을) 이런 류의 꾀는, 올곧은 의지를 가진 까닭에 정치권력에 결코 이롭지 못한 가난한 영화제가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천영화제의 검열비판은 잘먹고 잘살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권세가에게 내맡긴 여자가 잘먹고 잘살면서도 강간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하는 경우를 생각나게 한다.

인권영화제는 영화제를 위한 영화제가 아닌,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인권’을 가르치기 위한 치열한 ‘운동’이다. 이것이 인권영화제의 기본적인 인식이며, 이 인식 위에 서는 이상 인권영화제는 내일의 영광을 위한 고난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제1회 인권영화제를 관람한 어느 관객의 설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살아남기를 바란다

서준식(인권운동사랑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