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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기획: 안기부와 인권 ② 안기부의 역사

국가안보 아닌 정권안보를 위해


“국가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안기부가 이 지경이 돼야 합니까”

93년 12월 국회 정치특위 회의를 막 열려는 순간 조만후 안기부장 법률특별보좌관이 여야 타협안에 불만을 드러냈다. 특히 그의 불만은 직권남용죄 신설조항이었다. 결국 12월 7일 국회정보위원회 설치와 수사권 범위 축소를 골자로 한 안기부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안기부 직원의 정치관여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을 신설했고(18조) 안기부 직원의 직권남용 행위 금지(제11조), 회계검사 및 직무감찰 결과를 대통령 및 국회정보위원회에 보고하는 규정을 신설했으며(제14조) 국가보안법(국보법)에 규정된 죄 중 제7조(찬양․고무죄) 10조(불고지죄)에 대한 수사권을 제한하는 등 조직과 직무범위에 대한 제한적 규정을 두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안기부의 권한을 축소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93년 처음으로 권한 축소

61년 6월10일 중앙정보부법이 처음 공포된 뒤, 62년 4월 기획통제관과 차장보 직제를 신설하기 위해 개정된데 이어 63년 12월 군정이 끝나고 민정이양 헌법이 제정됨에 따라 대폭 바뀌었다. 이때 조직 소재지 정원예산에 대한 비공개가, 또 타부처 예산에 정보부 예산을 끼워 얹기가 법으로 확정되었다. 유신이후인 73년 3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죄에 대해 정보부가 수사권을 갖게 하는 부분개정이 이루어졌다. 79년 10․26으로 유신이 끝나고 80년 12월 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뀜에 따라 법이름도 바뀌었다. 그 뒤 87년 12월 4일, 94년 1월 5일 그리고 작년 12월 26일 날치기통과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국보법 제7조, 10조에 대한 수사권이 다시 안기부에게 주어졌다.


수사권 폐지 대신 국보위 설치

안기부의 변화는 61년 중앙정보부로 창설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크게 네 번의 변화를 가져왔다.

첫 번째는 창설이후 박정희 정권과 동거동락하며 18년간 지속되다가 79년 10․26 총성과 함께 막을 내린다.

두 번째는 중정에서 안기부로의 변화이다. 80년 4월 14일 최규하 대통령은 공석중인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임명했다. 전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 부장서리를 겸하면서 기구 및 인원개편 작업은 급속히 추진했다. 5월 6일 중정제도개선위원회는 세 가지 개편안을 내놓는다. 1안은 해외정보 분야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는 방안. 2안은 국내정보 중 수집기능만 유지하고 수사기능은 폐지하는 방안. 3안은 10․26 이전의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안. 전 부장서리는 “규모는 2안으로 하되 정신취지는 1안으로 하는 절충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박 정권 18년동안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민주인사’들의 주리를 틀어온 6국(안전국, 이른바 肉局), 그리고 끊임없이 국민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남산지하실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꼭 1주일만에 상황은 다시 반전되었다. 학원데모가 대규모 가두시위로 확산된 5월 13일, 전두환 부장서리로부터 편제개편 전면중단 지시가 떨어졌다. 이로써 중정이 신군부 쿠데타의 일역을 담당하게 되고, 죽었던 6국은 다시 살아났다. 당초 폐지 쪽으로 방향이 잡혀졌던 수사국은 ‘5․17’조치와 함께 시작된 김대중 진영에 대한 수사 때문에 되살아났다. 그로부터 나흘 뒤 5월 17일, 중정에 비상이 걸리고 안전국요원들의 활약이 시작됐다. 5월 27일 미명에 계엄군이 광주를 진압한지 10시간만에 소집된 국무회의에서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설치령’을 가결했다. 그리고 광주가 무력진압된 직후인 80년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나타났다.


안기부 개혁 여전히 과제

세 번째 변화는 김영삼 정권 출범과 함께 이루어진 안기부 개혁조치다. 한겨레신문은 안기부가 정당 및 중앙부처와 시․도, 구청․경찰서 등 일선기관까지 출입을 재개해 정보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95년 1월 18일자). 또 95년 2월 김덕 통일부총리(전 안기부장)는 94년 11월 작성된 것으로 드러난 안기부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연기 검토 공문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해임된다. 이 사건들은 안기부의 정치활동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기 위해 안기부법을 개정하고, 이에 따라 국회 정보위원회가 신설돼 그 활동을 감독하는 상황에도 여전히 막후에서 안기부가 정치문제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네 번째 변화는 95년으로 34년의 남산시대를 마감하고 내곡동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동안 19명의 부장이 거쳐갔는데, 4년만에 완공된 내곡동으로의 이전에 있어 안기부는 ‘남산-이문동의 두집 살림’에 따른 인력과 예산의 낭비, 업무의 비효율성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탄압과 공작의 남산’이 아닌 ‘국민과 함께 하는 안기부’가 될 것을 약속한 것이다.

또한 더욱 치열해질 정보경쟁시대에 대처하기 위해 거듭남을 거듭 밝혔지만 문제는 산적해 있다.
95년 2월말 언론보도에 따르면 국내 종합무역상사 등 민간기업들은 안기부가 출처인 해외정보 대부분에 대해 ‘낮은 등급’ 신뢰도를 매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유인즉 안기부에서 현재 해외정보를 취급하는 부서는 제5국(해외정보국)으로 전체 10국 중 1개국에 불과하며 나머지 9개국은 대부분 국내정보와 관련된 업무를 맡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인력배치도 국내부문에 치중해 주요 외교대상국을 포함한 50여개 국가에 파견돼 정보수집활동을 하는 해외파견 요원은 2백명 안팎으로 국내의 1개 도지부 단위에 근무하는 인원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얼마 전 있었던 김현철씨의 비리의혹 사건과 관련한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의 구속, 권영해 안기부장을 포함한 이들 3자 비밀회동은 바로 정치공작의 산실인 안기부의 현주소를 드러내주는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