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암과 싸우는 농민운동가 최종진

20년 농민운동에 헌신, “계획은 있다”


충북 미원의 한 농촌 마을에 자리잡은 자연건강요양원. 이곳은 지난 4월26일 폐암진단을 받고 내려온 최종진(47,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조직위원장) 씨가 요양 중인 곳이다.

한 달전 이곳을 내려올 때만해도 최종진 씨의 건강상태는 좋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찾아온 사람마다 좋아졌다는 인사를 할 정도로 상태가 좋아 보여 일단 안심이 되었다.

불과 1달여전에 그는 폐암진단을 받았다. 93년 12월, 95년 8월, 그리고 올해 4월초 엑스레이 촬영을 했으나 폐렴이나 결핵 같다는 진단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다 채 한 달도 안돼 갈비뼈 부위의 통증으로 숨을 못 쉴 정도여서 다시 병원에 와 엑스레이 재촬영 때야 이상이 발견된다.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것이다.

지금 최종진 씨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몸만을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달 열흘새 몸무게는 9킬로그램이나 빠져 앙상한 팔목과 종아리를 드러내지만 목소리나 얼굴표정에서는 여유와 따스함이 느껴졌다.


하루 종일 풍욕으로 암 치료

이곳에서 그의 하루일과는 새벽4시부터 시작된다. 그가 하는 운동은 풍욕이다. 옷을 벗고 맞바람이 통하는 방안에서 목안운동, 등배운동, 개구리운동, 붕어운동 등을 잠시도 쉬지 않고 30분간한다. 그리고 나서 30분동안 성경을 읽는다. 말하자면 이것이 휴식인 셈이다. 새벽 5시 다시 30분동안 풍욕을 하고 재빨리 뒷산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고 바람을 쐬다가 내려온다. 다시 풍욕, 30분내 서둘러 산보를 마친다. 이렇게 오전시간에 6차례 운동을 마친다. 오전10시 된장찜질, 점심식사 후 된장찜질을 하고 오후엔 빨래와 운동으로 시간이 간다. 다시 오후 7, 8, 9시 세 차례 풍욕을 하고 나면 하루일과가 마감된다. 그런 노력이 헛되지 않아 이곳에 와서 목에 혹처럼 붙어있던 인파선도 없어지고, 가래도 없고 기침도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의 전국농민회총연맹을 있게 한 주역이다. 75년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76년부터 81년까지 충북 제천으로 내려가 그의 평생의 직업이 된 농민운동을 시작한다. 20년이 지난 지금 죽음의 문전에 간 그가 삶을 시작하기 위해 충북으로 내려간 것은 또 하나의 인연인 셈이다.


10년전 농촌학생과 약속 끝내 지켜

그는 대광고를 나왔는데 당시 58년 서울고, 대광고, 숙명여고, 이화여고, 경기여고 이렇게 다섯학교 학생들이 모여 농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한빛 모임’을 만들었고, 66년 당시 학생회장인 그도 농촌봉사활동을 떠난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어린 학생들이 “선생님 이 다음에 저의 마을에 꼭 다시 와주세요”하는 부탁을 듣고 이 아이들과 같이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오늘의 그를 있게한 인연이 되었다. 지금의 부인인 임봉빈(44)씨를 만난 것도 한빛모임을 통해서다.

최종진씨는 3남 1녀 중 둘째이다. 막내 동생은 최종철(81년 당시 24세)씨인데 79년 10월 부마항쟁에 앞장섰다가 80년 6월 구속되어 81년 5월 출감한다. 출감한지 4개월도 안된 9월 1일 수배생활과 고문, 징역생활에서 얻은 병마와 싸우다 심장마비로 숨졌다.

81년 전두환정권 당시 “농민운동하면 빨갱이, 기독교농민회는 빨갱이”로 낙인찍힌 때여서 때로 경찰이 집집마다 찾아와 각서를 쓰게 하고 공무원이나 친척을 통해 회유를 했기 때문에 농민회 조직자체가 불가능할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밤마다 돌아다니며 교육을 했고, 그렇게 해서 81년 3월 12일 면소재지에서 60명이 모여 5시간 동안 총회를 갖는데 그때까지 경찰이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안기부와 보안사의 탄압으로 한달 만에 조직이 와해되고 3명만이 남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반 만에 그 3명이 더 큰 군단위 3개에 농민회를 조직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85년 7월은 농민들의 대중적 소몰이싸움으로 농민운동사상 기억되는 해이다. 그 해 4월 22일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기간에 맞춰 오후6시 60여명의 농민들이 세종문화회관에서 16차선을 가로질러 미대사관을 향해 뛰어가다가 30명이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다시 바로 이튿날 아침 8시 프래카드와 유인물을 든 농민들은 미대사관 옆 교보빌딩에 서 있다가 출근버스가 들어가기 위해 대사관 문을 여는 순간 미대사관 마당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인다. 그 사건으로 목이 짤린 사람은 어처구니없게도 종로경찰서 경비대장이다. 당시 농민의 시위를 막기 위해 종로서 경찰들은 미대사관 담을 넘어와 시위를 해산하는데 경비대장은 치외법권 지역을 침입한 이유로 직위해제 당한다. 이 사건은 청와대와 외교적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농민들은 전원이 풀려나 대전까지 호위를 받으며 내려왔다고 한다. 이 싸움은 농민운동사에 남을 커다란 성과를 거두는데 이를 계기로 농민투쟁은 생존권의 경제싸움에서 정치투쟁으로 변화되는 전환점을 마련한다. 그 뒤 그는 기독교농민회 사무국장을 지내고, 89년에는 전민련 조직국장 겸 사무차장으로 활동한다. 같은해 우리농축산물먹기 국민운동본부 사무국장, 제1기 전국농민회총연맹 연대사업국장을 지내며 91년에는 국민연합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다 강경대대책위 상황실장으로 맡았다가 투옥되어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93년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조직위원장을 맡는다. 93년 제4기 전농 사무처장, 제5기 사무처장 등을 지냈다.


지금은 건강회복에 전력

그는 농민과 속에서 뼈가 굵은 사람이다. 그는 농민운동은 무엇보다도 “운동가의 삶이 농민들에게 보여져야 한다”고 말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기다렸다가 가꾸는 그런 농심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 농민운동은 농민에 대한 사랑과 땅에 대한 사랑이 기본이다. 여기에 끈기와 인내를 필요로 한다.

끝으로 완쾌된 이후에 계획하고 있는 바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 그는 “하고픈 일에 대한 계획은 있지만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는데 전력할 생각이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계획은 있다”고 강조했다. 이 말을 하면서 어느새 그의 얼굴이 불그레해졌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힘든 일이라고 했다. 바로 지금 그는 자신과의 한판승부를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