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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단체탐방 10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 유가족협의회

젊은 영혼들의 일깨움과 아픔을 압제에 저항하는 용기로 승화시킨 '한울삶'

환히 웃고 계신 문익환 목사님의 얼굴이 담긴 검은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한울삶'이라 쓰인 단정한 문패가 걸린 한옥의 문을 들어서면 깔끔하게 정리된 방 하나가 있다. 흔히 사무실에서 볼 수 있는 기재들이 놓여 있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책장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향로와 또 한가지, 삼면의 벽을 두르고 있는 미색커텐이다. 그 커텐 뒤에는 민주화 재단에 목숨을 바쳤던 분들의 얼굴이 순박한 웃음을 띠고 있고, 그 미소가, 아니 우리에게 뭔가 얘기하고픈 모습이 벽면 가득히 차 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하늘이 무너지듯 하지만 자식이 무너지면 땅이 꺼진다고 했던가? 그 하늘과 땅 사이를 자신들의 어깨로 받치고자 자식, 남편, 형제를 잃은 분들이 모여 86년 8월 12일 민주화 운동 유가족 협의회를 만든 것이 오늘의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 유가족 협의회가 있게 된 시작이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래 이 땅의 모순을 안고 업고 쓰러져간 젊은 영혼들의 존재는 그 자체가 분노요, 참담함의 폭로요, 일깨움이요, 새벽을 알리는 울음이었다. 이 모두를 가장 뼈져리게 경험한 유가족들이 아픔을 한데 모으고 그것을 압제에 저항하는 용기로 승화시키고자 한 것이 유가협을 있게 한 힘이었다.

유가협은 처음엔 이소선 어머니 등 몇 분이 마포의 마리스티 수녀원에서 모이기 시작하여, 그간 열사들의 희생이 늘어남에 따라 현재 공식집계로는 156가족, 그중 유가협 활동에 참여하는 가족이 약 75가족이 되었고, 동대문에 '한울삶'이라는 작은 집을 꾸리고 열사들의 영정과 각종 자료들을 보존하고 있다.

현재의 조직구성은 작년 9월의 총회를 거쳐 회장 1인(강민조-고 강경대 열사 아버지), 부회장 2인의 회장단과 각 지회장,운영위원회,감사 2인, 사무국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간 유가협이 해온 가장 큰 활동은 크게 다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민족민주열사를 비롯하여 외세와 독재에 의해 죽어간 이들을 범국민적으로 추모하고 그 뜻을 잇기 위한 사업을 벌이는 것이다. 이는 '민족민주열사범국민추모사업회'를 중심으로 매년 '합동추모제'를 여는 것으로 집약되는데, 89년 개운사에서 첫 합동추모제를 가졌으며 올해 5회째를 맞게 된다.

둘째,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그에 따른 명예회복사업이다. 이를 위해 88-89년 당시 의문사진상규명특위가 구성되고 청문회가 열리는 등의 정치상황 속에서 오랜 농성과 국회청원, 자료수집 등의 의문사 진상규명 투쟁을 벌였고, 이 사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의문사의 경우 죽은 이를 다시 한 번 죽이는 결과를 낳는데, 예를 들어 타살의 증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단정하는 왜곡보도 속에서 본인의 의지와 구조적 모순 등은 희석화 되고 우울증이나 부적응자 등으로 왜곡되어 바르게 살고자 했던 본인뿐 아니라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 한을 심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런 분들의 명예회복이 되고 책임자에 대한 보상청구가 되야만 추모 계승사업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한분 한 분에 대해서 쌓여 있는 자료만도 엄청난 양이다. 그것들을 풀어헤치고 정리해 내는 일이 남아 있다. 그간 유가협에서 많은 자료집을 통해 소개하기는 했지만 짧은 문단으로 담아낼 수 없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물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럼 이 일을 누가 해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는 유가협이 해왔다. 누군가는 가족들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다. 그러나 유가협의 모습을 한번 머리에 그려보자. 젊은 자식과 남편을 잃고 몸과 마음에 병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죽음의 진상이라도 밝히기 위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느라 직장도 장사도 때려치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들어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오랜 농성과 최루탄 세례 속에서 병을 얻어 몇 년째 병석에 누워 있는 분들도 많다. 자신들의 생계 유지도 어려우면서 자식들의 뜻을 잇고자 민족민주단체와 유가협에 꼬박꼬박 후원금과 회비를 내며 살림을 꾸려오신 분들이기도 하다.

이상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아닌가? 역사의식을 조금이나마 가진 사람들은 독립유공자의 가족들을 제대로 대우 못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거나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며 통탄해 한다.

지금까지 유가협이 해 온 일은 유가협이 할 일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고 그분들을 초대하고 보여드려야 할 것이었다. 유가협의 사무국장 백종수 씨는 이 점을 힘주어 말한다. "유가협 사업은 이 땅의 정권이 올바로 섰을 때에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유가협만의 노력이 아니라, 다른 모든 단체들의 힘으로 전민족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이 땅의 양심을 위해 죽어 간 분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국민들이 대다수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알아야 하는 것이지, 가족들이 나서서 알아달라고 외치는 것은 우습지 않습니까?"

앞으로 유가협이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가족들의 끈을 다시 탄탄히 엮는 것이다. 오랜 싸움에 지치고 아프신 분들도 많고 서로 돌아봐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앞장서고 함께 할 일들이다. "민족민주열사 범국민 추모사업회"를 엄숙한 마음으로 강화하고, '의문사 사건에 대한 전면 재조사, 책임자 색출, 특별검사제 도입,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위원회 설치'에 대한 요구를 한 목소리에 담아 터트리는 것이다.

얘기를 나누는 내내 창밖에는 눈이 내렸다. 문밖에 나왔을 때도 하얀 눈과 찬바람이 하얀 개 한 마리가 함께 뛰어 놀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찾아오는 벗들이 많은가 보다.

<인권운동사랑방 류은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