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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동티모르, 독립운동의 어제와 오늘(자료집 요약)


1. 1975년 인도네시아 합병 전 독립운동

티모르는 인도네시아 군도의 남동쪽 끝에 있는 섬으로 호주 북쪽으로 약 500km 거리에 있다. 티모르섬에 서양인이 처음 정착한 것은 1566년 포르투갈 도미니크 수도회에 의해서였다. 그 후 2세기동안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티모르섬의 통치권을 놓고 갈등해왔다. 1913년 양국은 티모르섬을 동서로 분할 통치하기로 합의하였다. 2차 세계대전 후 서티모르는 인도네시아에 합병되었으나(1949년), 포르투갈은 일본으로부터 동티모르 통치권을 다시 뺏은 다음에 동티모르 독립을 위한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식민통치 시기 동안 티모르 인들은 끈질기게 저항했었다. 1880년대에 시작해서 1912년까지 이어진 최대의 독립운동은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모잠비크에서 지원군을 동원해서야 겨우 진압될 수 있었다. 이때 약 3천명의 티모르 인이 살해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티모르섬을 점령했을 때, 티모르 인들은 호주 군 장교들의 지휘 아래 반일 투쟁을 전개했는데 이 당시 약 4만 명의 티모르 인들이 희생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포르투갈은 동티모르에 대해서 다시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으나, 그 억압적인 통치방식 때문에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1960년대에 주로 다레신 학교 등에서 가톨릭계 교육을 받은 후 형성된 엘리트층은 1974년 포르투갈에서 파시즘이 끝나고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민족주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동티모르의 주요 정당은 모두 1974년 5월에 탄생하였다. 이중 규모가 가장 작은 티모르국민민주연합(APODETI)만이 인도네시아와의 통합을 지지하였다. 초기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티모르민주연합당(UDT)은 포르투갈과의 연방제를 추진하였다. 티모르사회민주연합당(ASDT) 후신인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FRETILIN)은 다른 정당보다 급진적인 노선을 견지하였다. 이 전선의 강령은 신민주의와 인종차별의 종식, 독립의 자결권, 즉각적 참정권 보장과 부정부패 추방운동의 전개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정당은 질서유지를 위해 점진적인 독립화 과정을 계획하고 1975년 독립을 위한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과도정부'를 준비하였으며, 정강으로 '완전한 독립, 외국으로의 합병 거부, 식민잔재 청산'을 삼았다.


2. 1975년 인도네시아 합병 후 독립운동

동티모르를 합병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인도네시아는 세 정당을 정략적으로 이간시켜 독립의 방법과 내용을 둘러싸고 동맹을 맺은 지 4개월만에 UDT와 FRETILIN 사이에 내전이 발생하였다. 내전은 FRETILIN의 승리로 끝났지만 식민지 종주국인 포르투갈은 애매한 입장을 취하였다.

'합법적' 합병의 기회가 사라지자 인도네시아는 포르투갈이 주저하는 틈을 이용하여, 미국과 호주의 묵인과 지원 하에 1975년 12월 7일 무력침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동티모르 민중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인도네시아 군대는 1978년 말까지 약 3년간의 전투를 치렀다. 이 과정에서 동티모르 전체 인구 60여만 명중에 1/3인 약 20만 명이 살해되거나 굶어죽었고, 인도네시아 군대도 약 3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이후 계엄령과 같은 공포정치가 시작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불법적으로 연행, 고문, 사형 당하였다.

한편 유엔은 총회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불법적인 동티모르 합병을 비난하고 철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와 경제적으로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진 강대국들은 당시 결의안에 따른 어떤 구체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유엔 들 국제사회에서 동티모르의 인권보호를 위한 실질적 조치가 거의 취해지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의 강권 통치 하에서도 동티모르 민중은 평화적 집회와 시위를 통해 저항을 계속 하였으며, 일부는 산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새로 등장한 미국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는 과거의 태도와 달리 인도네시아의 인권탄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유엔도 과거의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동티모르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투쟁해온 동티모르 민중의 피와 땀의 결실임과 동시에 국제 엠네스티 등 많은 양심적 시민 인권단체의 공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런 변화된 상황에서 1991년 11월 12일, 동티모르에서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던 군중에게 인도네시아 보안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약 200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현장에 있었던 영국 요크셔 방송국 카메라 기자에 의해 전 세계에 생생하게 보도되었다.


3. 산타크루즈 묘지 대학살 개요

포르투갈 의회 대표단이 동티모르를 방문하기로 한 1991년 11월 4일을 앞두고 동티모르에는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FRETILIN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대적인 시위와 집회를 준비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정체된 동티모르 독립운동이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1991년 10월 27일 방문 취소라는 충격적 소식이 알려졌다. 다음날 독립운동 활동가들이 피신처로 자주 이용하곤 했던 딜리시의 산 안토니오 교회에서는 평상시와 같이 주일 미사가 있었다. 그 일요일 밤 평복차림에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이 나타나서 교회 주위를 돌면서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에 교회 안에 있던 청년들이 밖으로 나가 항의하면서 두 집단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 후 새벽 2시경에 무장한 군인과 경찰들이 무차별 발포를 하면서 교회 내부로 진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바스치아노 고메즈 란겔(18세)이 교회 밖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교회 내부로 진입한 보안군은 안에 있던 약 40 명의 청년을 연행하였다. 이들 중 18명이 구속되었지만 행패를 부리던 집단 중에서는 아무도 구속되지 않았다. 사망한 고메스 란겔은 장례식 후 산타크루즈 묘지에 다음날인 1991년 10월 29일 안장되었다.

1991년 11월 12일 고메스 란겔 사망 14일제를 추도하는 미사가 봉헌되었다. 당일 새벽 6시 모타엘 성당에서 미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독립을 지지하는 현수막과 깃발을 들고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열은 보안군의 방해로 차단되자 방향을 바꾸어 산타크루즈 묘지로 행진하였다. 도중에 시위대 일부와 보안군 사이에 몸싸움이 발생하였고 이 과정에서 보안군 두 명이 칼에 찔려 숨졌다. 시위대는 행진을 계속 하여 묘지에 도착,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과 합류하였다. 시위대는 고메스 란겔의 묘에 헌화를 하였다. 숫자가 대폭 늘어나자 사람들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고, 보안군 추가 병력이 도착하였다. 이 때가 아침 8시경이었다. 보안군이 도착하자 사람들은 긴장했고 일부는 묘지를 벗어나 거리로 도피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보안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개시하였다. 앞에 서있던 사람들이 차례로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최소 100명에서 200여명 정도가 현장에서 살해되었다. 이 사건 이후 대대적 검거 선풍이 일어 수백 명이 구속되었고, 이후 일부는 고문 살해당하였다.

산타크루즈 묘지 대학살 사건을 접한 많은 사람들이 인도네시아의 야만적 인권 탄압에 경악하였고 국제사회에서 비난과 압력이 갈수록 높아졌다. 궁지에 몰린 인도네시아 정부는 마지못해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약속했지만 미봉책으로 끝났으며, 따라서 국제사회의 압력은 수그러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