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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홍성은 씨 기 자 회 견 문 (전문)

<1> 이 자리에 서게 된 경위

세칭 ‘유서대필 사건’의 범인으로 알려진 강기훈 씨는 징역 3년형을 받고 지금도 대전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기훈 씨를 범인으로 단정해버린 이 사건의 수사‧재판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고 생각되며, 특히 이 사건의 중요한 참고인으로서 재판에 큰 영향을 미친 제가 직접 경험했던 부분만을 생각하더라도 이 재판은 잘못된 것이었다는 확신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태어난 후로 처음 겪어보는 엄청난 충격 속에서, 세상도 사람들도 다 싫다는 생각을 하면서 도피적이고 은둔적인 삶 속에 파묻혀 버리고자 했던 과거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저는 언젠가 분명히 할 말을 하고 넘어 가야겠다는 생각을 늘 마음 한구석에서 해왔습니다.

오늘 서울지방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 자리에 강기훈 씨가 증인으로 나오고 다시 ‘유서대필 사건’이 거론됩니다. 검찰에도 법원에도 깊이 실망했던 저는 이 기회에 나라의 정치를 담당하는 분들 앞에서 어쩌면 평생 말할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를 솔직한 저의 심정을 털어버리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제는 새롭게 저의 삶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나와보면 말할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찾아온 국정감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가 발언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저는 그동안 호소하고 싶었던 이 ‘유서대필 사건’의 문제점을 제가 직접 경험한 범위에서 공표하고자 합니다.


<2> 제기하고 싶은 문제들

먼저 저는 이 사건으로 조사 받기 전에는 경찰이나 검찰에서 조사 받은 경험이 없었음을 밝힙니다. 이런 저에게 검찰에서의 계속되는 철야조사와 집요하게 말꼬리를 잡는 식의 조사는 몹시 힘겨운 것이었습니다.

검찰의 수사는 객관적으로 진실을 가려내기 위한 노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고 일단 범인으로 찍어 놓은 강기훈 씨를 확실하게 범인으로 몰아가는 집요한 안간힘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1) 저의 수첩에 적혀 있던 <김기설 743.9127,8 f)742.8289>은 누가 썼는가?

유서와 몹시 닮은 이 글씨에 관해 물론 저는 처음부터 김기설 씨가 썼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김기설 씨가 썼다면 언제 어디서 썼느냐는 검찰의 집요한 추궁에 저는 기억이 나지 않아 대답을 못했습니다.

강기훈 씨가 썼을 것이라는 검찰의 집요한 추궁과 “협조하지 않으면 너도 구속시킬 수밖에 없다.”는 강신욱 검사의 무서운 협박성 발언에 심신이 몹시 피로했던 저는 결국 마지막 검찰조서에 무인을 찍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일심 재판 때 강기훈 씨가 아니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확신하건대 그것을 쓴 것은 절대로 강기훈 씨가 아닙니다.


2) 참고인인 저에 대한 장시간 조사는 불법이었습니다.

1991년 5월 13일 오후 “잠깐 조사할 것이 있으니 같이 가자”며 수사관들이 처음으로 집으로 찾아온 이후 제가 검찰에서 조사 받은 시간은 다음과 같습니다.

*5월 13일 오후 16시-같은 날 20시(4시간)
(압수수색할 것이 있다며 다시 잠깐 집으로 갔다가)

*5월 13일 22시-5월 14일 20시(밤샘조사 포함 22시간)
(귀가하여 집에서 잠)

*5월 15일 10시-5월 17일 24시(17일 저녁 증거보전절차 포함 60시간)
전기간을 통하여 밤과 새벽에 조사를 받고 낮에는 송명석 검사 사무실 쏘파에서 자는 생활은 저를 몹시 지치게 만들었고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 어렵게 했습니다.


3) 강압과 협박 그리고 소모

5월 15일에 다시 검찰청으로 연행된 후로는 분위기가 너무 살벌하고 강압적이어서 많이 위축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말을 할 때마다 끈질기게 말꼬리를 잡는 식의 조사에 심하게 지쳐 있었고, 17일 15시경 조사 막판에 이를 무렵 저의 수첩에 적힌 <김기설 743.9127,8 F)742. 8289>를 누가 썼느냐에 대하여 집중 추궁을 당했습니다.

강신욱 검사가 “더 조사해야 하는데 48시간이 지났으므로 자살방조 혐의로 구속할 수밖에 없다.”는 협박성의 말을 했을 때 저는 심리적으로 크게 압박되어 검찰의 의도대로 조서를 작성하고 무인을 찍어버렸던 것입니다.

잠시 강기훈 씨가 유서를 대필했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갖게 된 이유는, 몹시 지친 상태에서 검찰이 강기훈 씨 필적도 아닌 혁노맹 문건(그것은 유서 필적과 비슷했다.)을 강기훈 씨 필적이라며 자꾸 저에게 들이댄 까닭이었습니다.


4) 검찰조사 후의 ‘잠적’에 대하여

1991년 5월 17일 24시에 검찰청을 나서자 곧바로 성남 이모님 댁으로 갔습니다. 아버지께서 거기로 가라 하셔서 순순히 갔는데 송명석 검사가 기자나 전민련 사람들이 찾아올 것을 우려해서 성남경찰서에 부탁하여 형사들로 하여금 이모님 댁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저는 거의 방안에서만 생활해야 했고 이모님 댁 골목 어귀에는 항상 차 한대와 경찰관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송명석 검사는 여러 차례 찾아와 저를 차에 태워 야외로 데리고 나가 이것저것 물었는데 주로 <김기설 743.9127,8 F)742.8289>를 쓴 사람에 대하여 조서내용을 확인하는 물음을 거듭했습니다.


5) 수첩 변조에 관련된 저의 진술에 대하여

강기훈 씨가 수첩을 조작했다는 것이 이 사건에서 강기훈 씨의 유죄를 결정했던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저는 김기설 씨가 분신하기 전날인 5월 7일 밤, 김기설 씨가 맡긴 수첩을 다음날 12시경에 연세대학교에서 전민련 관계자에게 넘겨줄 때까지 보관하고 있었으면서도 유심히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남에 있을 때 송명석 검사가 와서 그 수첩에 적힌 여러 군데 글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부분은 무슨 색이었느냐?” “이 부분은 무슨 필기구였느냐?”는 질문을 한참동안 하면서 자신 없이 대답하는 저의 말을 조서로 작성했습니다.

조서를 작성하고 나서야 송명석 검사는 비로소 품에서 김기설 씨 수첩을 꺼내어 보이면서 저의 진술 내용과 그 수첩에 적힌 필기구 종류가 일치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불일치’를 두고 수첩이 그 사이에 조작되었다는 것이 검찰의 주장입니다. 이런 수사방식이 옳은 것입니까?


6) 항소심에 증인으로서 법정에 나가지 못했던 이유

저는 항소심 때 변호인측 증인으로서 법정에 출두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저 자신이 법정에 나가 증언할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정에 나갈 예정이었던 전날 밤 21시경까지 외출했던 저를 송명석 검사가 여러 차례 전화로 찾았다고 하고, 밤 22시경에 검찰 수사관이 집으로 찾아와 아버님과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누다가 24시에 갔는데, 그 직후에 아버님과 저 사이에 (가정사이기에 별로 공개하고 싶지 않는) 심각한 일이 벌어져 결국 법정에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증인은 누구에게도 영향 받지 않고 법정에 나가 자유롭게 증언을 할 수 있어야 함에도 저의 경우 계속 검찰을 의식해야 했던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이상에서 저는 저의 경험에 비추어 이 사건 재판은 공정성이라는 점에서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강기훈 씨는 다시 공정한 재판을 받고 진실이 분명히 가려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1993년 10월 11일 홍 성 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