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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사그라든 취미생활에 불을 붙이려

“나 유튜브가 방탄소년단(BTS) ○○의 영상을 띄워줘서 보게 됐는데… 지금 계속 찾아보고 있어요.”

“오… 다 군대 간 이 시점에?” 

왜, 그, 저 인터넷에 유명한 사람들이 한 유명한 말 같은 게 있잖아요. 인생에, 삶에, 무엇을 시작하기에, 나를 바꾸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고요. 사랑방에서 나름 아이돌 전문가인 한 활동가에게 BTS 어떤 멤버의 무대 영상을 계속 보고 있다고 했더니, 어쩌다 뒤늦게 ‘입덕’─입문(入門)과 오타쿠(오덕후)를 합친 말로, 뭔가 새로운 분야나 대상에 빠져든 상태─하게 되었는지 궁금함이 얼굴에 떠오릅니다. 입덕에 ‘어쩌다’가 어디 있겠어요, 그냥 치이는 거죠. 좀 신기하게도 전 세계가 온갖 난리부르스를 출 때도 모르고 살다가 (사실 지금도 잘 모르고 남들이 그랬다고 하니 그러려니 합니다) 뒤늦게 혼자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입니다. 그런데 그… 기분이 좋아요!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고, 계속 지켜보게 되고, 떠올리면 좀 재밌고 설레고요. 

 

‘아 너무 좋구나’

최근에 ‘아 너무 좋다’ 생각하게 된 또 하나는 미디어아트 전시관입니다. 부산영화제가 열리는 매년 10월이면 친구들과 거친 예매경쟁을 뚫고 티켓을 거머쥔 채 부산에 가서 실컷 놀다 오는 게 저의 연례 휴가인데요. 2022년 어느 날에는 영화와 영화 사이에 너무 시간이 떠서 영화의전당 옆에 있는 현대미술관 ‘뮤지엄 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 너무 좋다고 누군가 올려놓은 글을 보고 별다른 생각 없이 들른 장소에서는 <치유의 기술>이라는 이름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 부산 뮤지엄 원

“<치유의 기술>은 앞서 우리가 선보였던 전시들에 비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상당히 명확하다. 우리는 관람객들에게 지난 2년여 동안 수고했고, 앞으로 조금만 더 버티며 힘내자는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 놓고 보니 결국 예술의 태생적 본질에 가장 가까운 전시가 되어 버렸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느낀 감정을 말로 설명하기란, 현대미술이나 미디어아트라고는 1도 모르는 저 같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닐 듯합니다. 하지만 ‘진보된 조형 언어’, ‘미학적 감성’과 같은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해도 메인홀에 들어서서 30분 동안 계속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작품은 전시의 취지를 다시 떠올리게 했습니다. 일상과 비일상, 익숙함과 낯설음의 경계가 무너지고 불안과 위험이 일상이 되었던 코로나19 이후 시기를 떠올려보면, 정말로 익숙한 여행길을 다시 밟게 된 것도, 그 속에서 낯선 평온함을 느끼게 된 것도 모두 ‘치유’받는 느낌을 주었거든요. 사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다가 굉장히 느리고 평온한 자극이 온몸에 쏟아질 때엔 눈물이 찔끔… (작품에 비해 감상이 너무 상투적이라 죄송할 지경) ‘뮤지엄 원’은 다시 부산에 가면 꼭 다시 가보고 싶은 장소가 되었습니다.

 

몸으로 쏟아지는 빛과 음악 속에

 
∆ 제주 빛의 벙커

그런데 왜 이런 장소가 더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던 걸까요? (취미생활 감각이 사그라든 지 너무 오래되어 더 찾아볼 생각도 못 하고…) 지난 연말-연초에는 사랑방 상임활동가들과 2박 3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또 다른 활동가가 열심히 짠 여행 경로에는 ‘빛의 벙커’가 있었는데, 가봤더니 너무 좋더라고요.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또 1시간 가까이 바닥에 주저앉아 <세잔, 프로방스의 빛>과 <이왈종, 중도의 섬 제주>를 보고 나서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냥 ‘좋다’는 말로도 왜 충분한지를요. 평소에 세잔 작품을 좋아했던 건 아닙니다. 이왈종 작가가 골프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쩐지 아름다운 색채의 골프장 그림이 슬프게 보였고요. 그런데 다시 ‘빛의 벙커’에 가보고 싶냐 묻는다면, 꼭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지만 또 사람들로부터 차단된 채 몸으로 쏟아지는 빛과 음악 속에 다시 놓이고 싶은 느낌 때문에요.

제주에는 ‘빛의 벙커’가 있지만 서울에는 ‘빛의 시어터’가 있다고 하니 안식주를 갖게 되는 2월 말에 꼭 가봐야지 결심하게 됩니다. 언젠가 ‘사그라든 취미생활을 뒤로 하고’라는 제목의 활동가의 편지를 쓰며 저에게 취미와 관심사가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날들에 슬퍼했는데… ‘아, 이런 게 다시 뒤늦게 찾아오기도 하는구나!’ 싶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죽는 날까지 또 다른 새롭고 흥미로운 것들이 계속 발견되고 또 찾아와주길 바라게 되고요. 다시 저를 채우는 것들을 하나하나 발견하는 재미와 설렘으로 2024년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다른 분들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