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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사그라든 취미생활을 뒤로 하고

며칠 전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미류를 만났습니다. 쉬고 있는 틈을 탄 사사로운 만남이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2019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평등정책TF 보고서 논의를 위한 회의였죠. 회의를 마치고 마카 일러스트를 배우는 마지막 수업에 간다며 그동안 그렸던 ‘작품’들을 모아놓은 파일을 들고 왔길래, 한 번 쭉 구경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그동안에는 미처 몰랐는데, 미류가 색상에 대한 감각이 꽤 좋더라구요. ‘이걸 수업시간에 다 그렸어?’ 싶었는데, 수업이 끝난 후 집에서 생각날 때마다 그린 일러스트들이 훨씬 많았어요. 자려고 누우면 이렇게 그려볼까 저렇게 그려볼까 하는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고요. 코로나19로 음미체(음악미술체육) 수업 개설이 여전히 순탄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취미생활과 함께 미류의 안식년이 즐거워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를 새롭게 배울 때의 집중력,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만드는 호기심과 활기찬 기운을 만나고 돌아오니, ‘나에게 그런 기운을 내뿜게 하는 취미생활이 뭐가 있지?’ 떠올려보게 됩니다. 한두 가지 있을 법도 한데 ‘바로 이거!’ 외치게 되지 않는다는 현실이 조금 서글프달까요. 이미 사그라든 취미생활만 떠오르고 어쩐지 내가 인생을 잘 못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치닫게 됩니다.

 

생각해보니 만화책을 엄청 사 모으며 읽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4년 전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10년 가까이 사 모았던 만화책의 대부분을 버리거나 중고책방에 팔았죠. 홍대 인근에 살 때는 만화전문서점들이 근처에 있어서 주기적으로 신간을 살펴보고 한 두 권 쯤 사서 귀가하는 게 일상이었어요. 쉬는 날에는 ‘난 방구석의 쓰레기야’ 하는 심정으로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만화책을 읽다 잠들곤 했고요. ‘이건 도저히 버릴 수 없어!’ 동거인 가족과 타협한 끝에 몇 몇 작품만 남기고 다 처분한 후로는 들를 일이 있어도 다시 만화책을 잘 사게 되지 않더라구요. 지금은 김혜린 작가의 <인월>이 단행본으로 나올 때 종종 서점에 들러 고양이 만화책을 한두 권 사는 정도랄까요. 정말 훌륭한 작품들, 정말 좋아한 작품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제목조차 가물가물하고요. 당시에 중고책값으로 50만원 가까이 받았던 기억만 생생한걸 보니, 그 값에 취미 하나를 뒤바꾼 셈인가 싶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사랑방 사무실을 오갈 때,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마다 귀에 에어팟을 꽂지만, 음악도 예전만큼 찾아서 듣지 않게 된지 오래된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항상 뮤지션 오지은 씨가 『익숙한 새벽 세시』에 쓴 문장이 떠오릅니다.

 

“전부터 들어왔던 곡이 단물이 다 빠진 껌처럼 느껴지고 새로운 음악은 아예 들어볼 생각조차 들지 않는 상태가 나의 증상 중 가장 슬프고 무서웠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땐 저도 너무 슬프고 무서운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나요. 지금 상상해도 너무 무섭네요…. ㅠㅠ 음악이 자기 삶에서 너무 중요했고 중요한 사람 모두에게 그렇겠죠. 그럴 때 같이 사는 동거인 가족이 여전히 음악을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좋은 것 같아요. 한정판 LP를 사야 된다면서 저를 레코드페어에 끌고 가고, 매년 자라섬재즈페스티벌에 데려 가고(그래서 살아생전 카에타누 벨로주 공연을 눈앞에서 보고), 여전히 좋아하는 뮤지션의 CD를 사고, 집에 같이 들어오면 항상 오디오부터 켜거든요. 저도 옷을 벗고 짐을 정리하다가 귀에 멈추는 음악이 있으면 ‘누구 앨범이야?’ 묻게 됩니다. 모든 상투적인 표현들을 동원해 어떤 앨범 혹은 뮤지션의 탁월함을 설명하는 걸 듣고 있다 보면 괜찮은 기분이 됩니다. 앞으로 집을 나설 때 듣게 될 좋은 음악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뭔가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는 사람의 기운은 듣는 사람도 기분 좋게 하는 뭔가가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일 년에 100번 정도 극장에 가니 영화를 보는 것이 취미생활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취미생활’이라고 하기엔 또 적절하지 않은 느낌입니다. 제가 영화를 보러 갈 땐 현실 도피인 경우가 많고, 또 반대로 영화를 보고 나오면 현실을 직면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영화음악을 찾아 듣는 것은 취미생활이라고 할 법 합니다. 영화에 너무 매력적인 음악이 나오고 그 음악이 영화의 어떤 장면을 잊을 수 없게 만들면, 영화를 보고 나와서도 몇날 며칠은 그 음악만 반복해서 듣게 되거든요. 올해 초에는 <윤희에게>, <마티아스와 막심>, <두 교황>, <결혼이야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페인 앤 글로리> OST를 반복해가며 들었는데, 이제 이례적으로 추웠던 4월의 봄도 지났으니 플레이리스트를 바꿔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예전만큼 혼자서 즐기는 취미생활은 많이 사그라들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대신 친구들과 함께 하는 일들에 더 많은 시간을 쓰기도 합니다. 제 친구들은 뭔가 좋은 걸 보면 ‘지금 당장 가자’고 외치고, 맛있는 걸 먹고 나면 ‘꼭 같이 가서 먹어야 돼’라며 부추기는 사람들 투성이거든요. 얼마 전에는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 <행복>을 꼭 봐야 된다고 추천했는데, 다 같이 보러 가자면서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서 한 참을 웃엇습니다. <행복>은 보고 나면 행복해지는 그런 영화는아니거든요. 그래도 함께 뭔가를 즐기는 건 분명 행복해지는 일이죠.

 

△어느 해, 첫 운동 참관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

저도 이제 다시 운동에 취미를 붙여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다행히 사랑방에는 올해부터 새롭게 책정된 ‘건강지원금’ 예산이 있습니다. 질병 치료와 같은 목적으로는 사용할 수 없지만, 운동과 같이 건강을 지키고 증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금을 편성한 것이죠. 매년 활동가들의 건강을 챙기시는 회계감사님의 염려도 덜어드리고, 실제로 시간과 여유가 부족해 운동을 결심하기 어려운 활동가들을 조금이라도 더 독려해보자는 차원입니다. 안식년인 미류가 첫 번째로 건강지원금을 사용했는데, 아직은 아무도 이 건강지원금을 쓴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제가 두 번째로 건강지원금을 사용해서 운동을 등록하고, 운동 한 후의 기분 좋은 기운을 전파해야 할까 봅니다.

 

포부가 큰 취미생활 계획이지만, 다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 것이니까요. 다음 활동가의 편지를 쓸 때쯤에는 ‘그래도 나름대로 잘 살고 있어’ 하는 마음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정말 지겹고 상투적인 결론이지만 취미생활을 떠올리다보니 언제든 뭔가를 새롭게 배우고, 지금처럼 활동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과 행복하게 살려면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에 (백만 번째) 이릅니다. 다들 수영, 필라테스, 요가, 복싱까지 운동 하나쯤은 하고 사는데, 저는 아직도 침대에 엉켜 있는 쓰레기(물론 고양이랑 같이 엉켜 있는 덜 외로운 쓰레기)인가 싶습니다. ㅠㅠ 한 때는 조금이라도 근육을 붙여보겠다고 매일매일 운동하며 운동처방사 선생님과 달라진 임바디 수치에 기뻐하기도 했는데 말이에요. 취미생활의 중요한 요건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를 움직이게 하는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떠올려보면 저에게도 운동 후의 가뿐함과 상쾌함으로 꼬박꼬박 운동을 하러 나갔던 기억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