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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코로나 핑계로 쉴 수 있는 삶의 조건

아프다는 감각에 반해 안 아픈 상태를 감각하는 건 다소 낯선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 일주일이었다. 7월의 첫날 열린 활동가대회를 다음날 마무리한 직후, 내 몸은 좀 아팠다. 심한 두통과 메스꺼움으로 대회 준비팀 동료들과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 직후 기절하듯 정신없이 잠에 빠졌다. 겨우 붙들고 있던 의식의 끈이 언제 빠져나갔는지 엉뚱한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여긴 어디? 나는 누구?’를 몇 차례 반복한 뒤 간신히 집에 당도할 수 있었다. 열과 땀에 쩐 채 쓰러져 내리 두시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여전히 두통이 남아있었지만 미미한 수준이었고 다만 목소리가 살짝 갈라지는 듯 했다. 놀랍도록 시끄러웠던 활동가대회 뒷풀이 소음에 기여한 목청에 새겨진 상처라 생각했다. 새로운 한주가 시작되었을 때, 활동가대회 참가자로부터 확진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줄줄이 확진이 되었다. 나를 포함해서.

감각하기에 코로나19는 몸살증상과 비슷했다. 익히 알려진 인후통 증상은 심하지 않았지만, 열을 동반한 근육통은 사흘 내내 사람을 축 쳐지게 했다. 나흘째가 되자 열로부터 해방되었다. 차츰 정신이 맑아지는게 느껴졌다. 아침에 눈을 떠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전해지는 힘을 느꼈다. 흐릿한 눈동자가 또렷해진다는 건 사물이 선명하게 보인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채집하듯 집안 구석구석에 카메라를 들이댈 의욕을 회복했다.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자 처방받은 약은 과하게 느껴졌고, 오히려 내 컨디션을 내내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약의 가짓수가 9개였는데, 이 바이러스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의 결정체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자가발전 중인 바이러스 앞에 내가 이 세계의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약 한 봉지를 집어 삼키는 일 뿐이라는 생각에 일단 의심은 접어두기로 했다.

격리된 지 엿새째 아침이 되자, 예전보다 좋은 상태가 되었다. 명백한 증거가 있었다. 신경쓸 일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미친듯 가렵던 손바닥도, 양쪽 검지의 손마디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 얼굴 피부는 전에 없이 매끈해졌다. (안 그래도 잘 챙겨먹는 세끼 식사는) 약을 먹느라 더 잘 챙겼고, 에어컨 바람 앞에 베어물기 무섭게 새콤한 과즙이 새어나오는 복숭아를 달고 사니 습한 장마도 밉지 않았다. 본디 재생산은 어제와 같지 않은, 어제의 피로를 말끔히 씻고도 다시 활동할 에너지가 채워지는 어제보다 나은 컨디션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복기했다. 일상으로 복귀하면 말짱 도루묵이 될 공산이 크지만.

코로나 덕(?)에 예기치 않게 쉬었다. 마침 나는 조금 지치고 피로한 상태였다. 출근을 앞두고 동료에게 코로나 걸렸을 때가 그립다고 말했다. 웃픈 현실이지만 그 말은 참이었다. 아프면 쉬어야 한다는 단순하고 참인 명제가 실제 세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이 경쟁적이고 착취로 가득한 세상에서 코로나 덕에 잘 쉬었다는 말을 쉬이 뱉을 수 있을까. 내가 질병으로부터 회복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던 건 확진자 격리 정책 덕분이 아니라, 쉬는 게 당연하다고 믿는 사람으로 구성된 일터에 속해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기적으로 안부를 물으며 정서적으로 돌봐주는 두터운 관계망이 결국 안락하고 안정적인 한 주를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출근도 전에 산적해있는 일들에 부딪힐 용기와 의욕이 솟는데, 그것은 아마도 기력이 충만해진 자의 허세 같은 것이겠지. 그런 허세가 생길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된 덕분에 나는 비로서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