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활동가의 편지

흐르게 하는 시간

몽1.jpg

요즘 몸이 무겁습니다. 양쪽 어깨에 곰 한 마리씩을 얹고 걷는 느낌이 들 때가 있잖아요. 한겨울 내내 달고 다니던 코감기는 다 나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쳐 지나간 것 아닐까’ 의심하며 한 두 번의 코로나 자가키트 검사는 모두 음성이 뜹니다. 마음도 영 편하지는 않습니다.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은 트이지 않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을 잘 정리하기보다 저기 어디쯤 치워버리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지금 내가 딱히 힘든 일이 있는 건 아닌데…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마음이 가라앉고 있다고 느끼자마자 (서로 일이 맞물려 있는 동료들에게 미안하지만) 오늘 내일 해야 하는 일들을 미뤄두고 그냥 드러누워 책을 뒤적였습니다.

*
냉동해둔 마음

“‘냉동’해 둔 마음, 기억, 슬픔들이 곧 흐를 수 있는 시간이 있기를.”

지난 연말에 한 친구가 메모와 함께 <여섯 밤의 애도>라는 책을 선물해주었습니다. 누군가를 자살로 잃은 자살 사별자들의 여섯 번의 애도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책이었습니다. 책을 선물할 당시에 그 친구는 제 마음이 어딘가에 냉동되어 멈춰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을 것 같아요. 오랫동안 관계를 끊고 지낸 다른 친구를 잃은 직후였거든요. 선물 받은 지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책을 읽으면서 한 구절에 눈길이 갔습니다.

“온전한 슬픔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은 … 빈자리를 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삶은 의미 있고 즐겁다는 것”

빈자리를 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의미 있고 즐겁다고 느끼는 건 어떤 걸까, 아직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 삶이 의미 있고 즐겁다고 느끼는데 그것만은 분명한데… 가끔씩 빈자리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을 멈추게 됩니다. ‘무엇을 했거나 무엇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인이 자살했다는 죄책감, 고인에게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만일 그랬더라면의 죄책감, 고인의 죽음 직전 몇 달 혹은 몇 년 전에 실제로 저지른 사별자의 어떤 잘못 때문에 비극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죄책감.’ 책에서 다루고 있는 수많은 자살 사별자들의 죄책감들 중에서 하나하나 제 것이 아닌 죄책감이 없지만… 점차 옅어지기보다 예상치 못한 순간들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시간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친구도 동료도 아닌 관계로 상실을 맞이하게 된 이후에, 그 친구의 삶 전체를 떠올리면서 잘 기억하려는 노력조차도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
빈자리를 보면서도

책을 읽으면서 그 친구는 나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려봤습니다. 몸도 마음도 어딘가 조금씩 무거운 요즘과 같은 때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다른 사람 이야기는 됐고, 그래서 넌 어쩌고 싶은데?’ 직구를 날리던 친구, ‘이렇게 저렇게 또 해보면 되지 않을까, 내가 같이 할게’라는 말을 늘 빼놓지 않았던 운동의 동료. 하지만 그 친구를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시간,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고 애써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은 어떤 문장으로 쓸 수 있을지 아직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선택적으로 떠올리지 않는 기억을 다시 돌아보고 관계를 스스로 재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는 걸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아서 미루어두었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왔던 것 같아요. 애도는 고인을 잘 기억하는 과정이라고 하는데, 나는 아직 충분한 애도, 적절한 애도의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냉동되어 있는 마음과 기억을 잘 꺼내고, 잘 녹이고, 잘 말리고 싶습니다. ‘할 수 있는 게 없네’ 하는 심정이 들 때, ‘나는 원래 그랬어’ 무력해지는 마음이 들 때, 다른 용기를 낼 수 있도록.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내가 같이 할게’라고 말해주었던 사람의 빈자리가 그리운 만큼, 내가 누군가에게는 그런 친구와 동료가 될 수 있도록. 삶이 의미 있고 즐겁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빈자리를 보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친구를 떠올리며 함께 했던 시간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싶습니다. 이제 미루어둔 마음의 숙제를 해야 할 때네요.

몽2.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