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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기획> 무노조 삼성의 인권유린을 고발한다 ①

‘덫’에 걸린 노동자

삼성그룹. 편법·탈법 상속과 족벌경영 등으로 줄기차게 도마에 오르면서도 끄떡 않고 버텨내는 재계의 실력자. 이 공룡자본에겐 또 하나 붙어다니는 별칭이 있다. 바로 '무노조 신화'의 주인공. 삼성그룹이 금과옥조처럼 받들어온 무노조 신화 뒤엔 힘없는 노동자들의 고통과 참담함, 눈물과 피가 배어 있다. 그 알량한 무노조 신화를 위해 삼성그룹이 저질러온 인권유린의 실상을 고발한다[편집자주].


수의 입은 노동자

19일 오후 3시 30분 수원지방법원 110호 법정. 수의를 입은 한 노동자가 피고석에 앉았다. 얼마 전까지 삼성SDI(옛 삼성전관) 수원공장에서 일하던 박경열(40·제조2그룹) 씨. 그는 삼성의 무노조 신화에 의해 짓밟힌 또 한 사람의 희생자였다.

박경열 씨의 구속 사유는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 공소사실은 다음과 같다.

"올 10월 15일 회사 내에서 피해자 윤일철(제조2그룹 부장)에게 식칼이 든 가방을 보여주며 '가방에 칼이 들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다 죽여버리고 자살하겠다'며 피해자의 신체에 해악을 가할 듯한 태도를 보여 협박"하고 "10월 16일 제조팀장 권기창에게…" 같은 식으로 협박, 그리고 "같은 날 회사 정문 경비실에서 경비원인 피해자 정주현이 가방을 검사하자고 하자, 안에 들어 있던 식칼을 꺼내 들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면서 피해자를 향해 칼을 수회 휘두르는 등 해악을 가할 듯한 태도를 보여 피해자를 협박"했다는 것이다.

겉으론 볼 땐, 일반적인 협박·파렴치범에 불과한 공소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배후에는 삼성그룹의 뿌리깊은 무노조 전략이 도사리고 있었다. 노조를 만들어보겠다던 한 노동자가 회사의 회유·협박 속에 참담하게 무너져가던 끝에 '덫'에 걸린 사건, 이것이 이번 사건의 내막이었다.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노조설립 추진하다 발각

박경열 씨는 이른바 '노조설립추진세력'의 일원이었다. 85년 입사후 대통령표창까지 받을 정도로 열심히 일해왔던 박 씨는 99년 처음으로 노조설립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회사측이 노조 설립 움직임을 알아냈고, 이로 인해 박경열 씨는 일주일간 충청도와 강원도 등지로 옮겨다니며 회사 간부로부터 '노조설립 포기각서'를 종용받았다. 당시 박 씨와 동행했던 윤일철 제조2그룹부장은 12월 19일 법정진술을 통해 "박경열 씨에게 회사에 물의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내용의 답변을 요구했으며, '불만이 있으면 절차를 거쳐서 면담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요지의 각서를 받아냈음"을 시인했다.

그 사건 이후 회사측은 관련자들을 해외로 내보냈으며, 박경열 씨도 올 2월 말레이시아로 파견됐다. 당시 박 씨는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해(박 씨의 아버지는 뇌종양으로 올 11월 사망했다) 파견근무를 거부했지만, 결국 회사의 방침을 거스르지 못했다. 이에 대해 윤일철 부장은 "박경열 씨 아버지의 뇌종양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업무상' 파견을 보낸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자살용 칼', 협박용으로 둔갑

올해 4월 말레이시아에서 돌아온 박 씨에게는 여전히 회사측의 압력과 관리가 계속됐다. 박 씨는 회사측의 집요한 만류로 동료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으며, 휴식시간에도 감시가 이어져 정신적 부담감이 늘어갔다고 한다. 이미 '각서'를 쓰면서 스트레스에 시달려왔던 박 씨는 술로 이를 달래왔다.

문제의 '칼' 사건은 동료 노동자의 해외파견 문제로부터 촉발된 것이었다. 박 씨는 예정된 기간이 지나도록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동료의 부인을 대신해 회사측에 동료의 조속한 귀국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회사측으로부터 이를 거절당하던 끝에 마침내 '자살'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염두에 두며 '칼'을 갖고 다니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번 사건을 두고, 박 씨의 가족들은 회사측의 '함정'이라는 의혹마저 제기하고 있다. 박 씨가 칼을 휴대하고 회사로 들어갔던 10월 16일. 일상적으로 출입자를 검색하던 경비들이 박 씨를 아무 검사없이 들여보냈다가, 박 씨가 권 팀장과의 면담 후 정문 밖으로 나가려하자 갑자기 가방검색을 요구했던 것이다. 결국 가방을 뺏으려는 경비와의 실랑이 도중 박 씨가 '칼'을 꺼내들어 자신의 배에 갖다대며 '가까이 오면 자살하겠다'고 외치게 되었다. 박 씨는 이어 경비실로 들어가 경비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몇 분만에 출동한 경찰에 의해 현행범으로 연행돼 구속되었다.

19일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한 윤일철 부장 역시 "박 씨가 내 앞에서 칼을 뽑아든 사실이 없으며, 누군가를 죽여버리겠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도 없다"고 밝혔다. 특히 윤 부장은 "박 씨와의 면담과정에서 신체에 위협을 느끼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공소장에 기재된 박 씨의 혐의 사실은 '윤일철 부장에게 신체에 해악을 가할 듯한 태도를 보여 협박'했다는 것이었다.

구치소 유리창 너머로 박 씨는 "난 엮인 것이다"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박 씨의 석방을 위해 '탄원'할 의사가 전혀 없다. 삼성SDI 수원공장 인사부장은 "박 씨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약속을 해야만 고발 취하도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회사측으로선 이번 사건이 골칫거리 하나를 해결할 좋은 기회였던 셈이다.

박경열 씨의 다음 공판은 1월 16일 오후 2시 수원지법 110호 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