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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지치지 않고 묻고 또 묻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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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써야지 하고 한글 파일을 열어 그 희고 너른 바탕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중이었어요. 함께 사는 고양이 망고가 성큼성큼 달려와 제 다리 위에 자리를 잡고 눕더군요. 에어컨을 켜는 것이 내키지 않아 선풍기만 회전 모드로 틀고 있었던 터라, 허벅지에 빠르게 땀이 차올랐어요. 누르는 무게는 또 어떻고요. 망고가 제 몸의 쿠션을 찾아서 오는 게 매일 있는 일은 아니어서 꾸욱 참았습니다. 그러다 어깨와 팔을 조금 움직였는데, 단지 그뿐이었는데, 망고는 제 노력도 몰라주고 휑하니 내려가 버리더라고요. 저는 망고를 한 번 힐끔 째려본 뒤, 마지막 핑계도 사라졌으니 이젠 정말 쓰기 시작해야겠구나 생각합니다.

수개월 전부터 사랑방 기후위기인권모임 자원활동가로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어요. 세미나가 아니었다면 목침으로 쓰였을 게 뻔한 <탄소사회의 종말>을 함께 완독한 뒤여서, 그 직후 모임이었던 지난 시간에는 작년에 진행된 ‘기후위기 인권침해 증언대회’의 인터뷰 자료를 중심으로 세미나가 진행되었어요. 증언대회에서 인터뷰어로 큰 역할을 했던 정록 님이 모임 때 던진 질문이 마음에 남았어요.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을 떠나 기후위기를 마주하는 감정은 개인마다 너무도 큰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고, 누구는 그 앞에서 특별한 감정 같은 것 없이 덤덤한데, 누구는 후세대에 대한 죄책감과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한 청소년 활동가의 경우에는 위기감과 공포로 인한 트라우마 증상까지 보인다고요. 그러면서 정록 님은 여기 있는 자원활동가들의 경우는 어떤지를 물었죠. 다들 곰곰 생각하며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어요. 빠르게 다른 주제로 옮겨갔고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 질문이 떠올랐어요. 무엇보다 이 문제와 관련해 고군분투하는 청소년 활동가의 이야기가, 기후위기로 인한 불안뿐 아니라 고립감과 외로움 역시 크게 느끼고 있을 그의 상황이 특히 마음에 걸렸어요. 대부분의 기성세대는 물론이고 또래집단조차 기후위기 문제를 남의 문제나 먼 미래의 문제로 보고 있는 이 상황이 그에게 얼마나 막막할지.

제 가족 중에도 청소년이 둘 있거든요. ‘미래 세대’인 이 둘 때문이 아니라 지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우리와 지구를 함께 쓰는 비인간 존재들에 대한 생각 때문에 기후위기 대응과 체제 전환을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로 여겨왔지만, 두 여성 청소년의 양육자라는 제 위치를 말끔히 지우는 것 역시 올바른 방식은 아니라고 봐요. 해가 다르게 체감되는 기후변화 앞에서 더 오래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이들과 집을 공유하며 살을 맞대고 살기에, 그 청소년 활동가의 고통의 감정이 마냥 멀게만 느껴지진 않았죠.

저 역시 평소 기후위기 문제를 떠올릴 때 불안과 슬픔을 꽤 크게 느껴왔어요. 기후‘변화’는 이미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방식과 체제를 ‘변화’시키는 데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 저의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요. 어쩌면 그 청소년 활동가와 다르지 않은 상황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기후위기 문제에 내내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만큼 이 사회가 평온하지 않다는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이랄까요. 한 해에 2400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죽어나가고, 노동시장에서의 극심한 배제로 인해 20대 여성이 자살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으며, 성소수자와 장애인, 어린이, 여성, 노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그들의 삶을 전쟁터로 만드는 등 기후위기 문제가 문제화되기 이전부터 있어온 문제들이 우리 몸과 마음을 수시로 빼앗아요. 이에 대한 투쟁과 싸움과 주시 또한 늦출 수 없다는 것이 우리를 기후위기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을 수 없도록 만드는 요인인 거죠.

이미 있어온 이 모든 삶의 문제들과 기후위기라는 문제가 어떻게 하면 함께 엮여 더 큰 운동의 테제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각각의 투쟁 에너지를 제로섬 게임의 판 위에 오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요. 활동가나 시민, 몫 없는 자 중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모두의 싸움을 우리는 과연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요. 사랑방 기후위기인권모임의 자원활동을 하는 동안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가고 싶어요. 질문이 질문을 낳고 하나의 슬픔이 또 다른 슬픔을 낳는다 해도, 지치지 않고 묻고 또 물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함께 사는 고양이의 ‘망고’라는 이름은 그 털색이 과일 망고의 색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한데 또 다른 뜻도 있어요. 잊을 망, 괴로울 고. 괴로움을 잊기. 망고와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가, 잊어야 할 괴로움이 도처에 있음을 너무 깊이 느끼던 때였으니, 그 이름이 붙여진 건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그것들은 잊고 싶었던 것일 뿐 잊어야 하거나 잊어도 되는 것들은 아닌, 삶 자체였다는 사실을 지금은 알아요. 다리 위에 누워 있던 망고(괴로움을 잊는 일)가 훌쩍 가버렸을 때 비로소 글쓰기를 시작했던 것처럼, 괴로운 이 삶의 문제를 잊지 않고 제대로 기억해낼 때에라야 싸움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겠죠. 기억하고 직면하고 질문하려고요. 함께라면 좀 더 오래 해볼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