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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재난지원금 정치'를 넘어 사회적 권리가 필요하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기간 지속되고 영업제한조치를 당하게 된 자영업자들의 피해가 극심해지자, 정부 여당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대책들이 나오고 있다. 정세균 총리가 자영업자들의 영업손실보상 법제화 검토를 지시했고,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2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전 국민 대상의 4차 재난지원금을 위한 추경예산 편성을 밝혔다. ‘기본소득’을 자신의 정치의제로 삼은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2월 1일부터 경기도민 모두에게 재난지원금 10만원 지급을 시작했다.

 

코로나19는 서구 선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보건위기를 불러왔다면, 한국에서는 장기간 지속된 방역조치로 인한 자영업자와 불안정 노동자들의 생계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한 정부 여당의 답은 재난지원금이다. 작년 5월 지급된 1차 전 국민 재난지원금(14조원)부터 9월의 2차 재난지원금(8조원)에 이어 올해 1월 지급되기 시작한 3차 재난지원금(9.3조원)까지. 코로나19 이후, 정부 정책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재난지원금’ 두 축으로 굴러왔다. 하지만 ‘방역’보다는 ‘선거’와 결합한 정부 여당의 재난지원금 정치 1년은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사회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시민적 권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재난지원금이 아닌 방역예산이다

 

2020년 3월 22일에 첫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었다. 종교시설과 일부 업종에 대한 영업제한조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영업제한에 따른 피해보상은 애초에 없었다. 음식, 도소매, 여행업을 중심으로 한 실물경기가 위축되고 경제적 피해가 가시화되자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전 국민 재난지원금이었다. 소득과 매출 감소를 증빙하기 어렵고 이를 분류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였다. 방역조치에 따른 당연한 손실보상 논의는 사라지고, 엉뚱하게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만 들끓었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그 경제적 피해 양상이 좀 더 분명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미 공고해진 기업 간 격차는 고스란히 노동자의 타격으로 이어졌고, 코로나19는 이를 더 크게 확대했다. 550만 명에 이르는 자영업자와 그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른 가장 큰 피해 집단이 되었다. 2차, 3차 재난지원금이 이들에게 집중된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여당이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4차 재난지원금은 다시금 4월 보궐선거를 앞두고 전 국민 지급을 하려고 한다. 1차 재난지원금이 작년 4월 총선 전에 결정된 것을 돌이켜보면, 정부 여당이 여전히 ‘방역’이 아닌 ‘선거 정치’에 몰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재난지원금은 왜 이렇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었을까? 정부의 방역에는 그 실행을 위한 ‘예산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행정명령에 따른 방역조치로 영업을 할 수 없게 되면 당연히 노동자 고용유지가 포함된 손실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방역은 공중보건상의 조치일 따름이고, 그에 따른 피해에 대해 정부가 그때그때 호의를 보여 재난지원금을 내준다는 식이다. 그러니 어쩔 때는 코로나19로 정신적 피로감을 느끼는 전 국민에게 지원금을 지급하고, 통화량이 늘어난 국민들을 위한다며 통신비를 지원하게 된 것이다. 급기야 이재명 지사는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며 경기도민 모두에게 지역화폐를 2차례나 지급했다. 대체 이 돈이 코로나19 피해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 동안 집행된 30조원에 이르는 재난지원금은 ‘재난지원금’이 아니라 사회적 거리두기 집행을 위한 ‘방역예산’으로 사용되었어야 했다. 조만간 집행될 것으로 보이는 4차 지원금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에 민주당과 기획재정부 사이에 형성된 허구적 대립구도가 문제를 왜곡한다. 마치 민주당은 코로나19로 인한 국민들의 경제적 피해를 책임지려는 세력이 되고, 기획재정부는 가진 자들의 곳간을 지키는 관료가 되는 것이다. 이 대립이 허구적인 이유는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가능한 재정범위 내에서’라는 점에 이들 모두 동의하기 때문이다. 총리가 기재부 장관을 ‘개혁저항세력’이라고 칭하고, 여당 의원들이 일제히 기재부를 비난하지만 어느 누구도 재원마련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선진국 사례를 들며 국채발행을 과감히 하자는 주장도 나오지만, 이것 역시 현재 문제를 미래로 미루는 것일 뿐이다. 소득상위 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재난연대세’,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법인세 인상’과 같은 구체적인 증세계획이 없다면 민주당은 기재부를 상대로 대단한 정치투쟁을 벌이는 것과 같이 호들갑은 떨지 말아야 한다.

 

정부의 호의 또는 청구권이 된 사회적 권리

 

이런 재난지원금 정치는 당장 생계위기를 겪는 수많은 이들의 어려움에 실효성 있는 지원책도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코로나19가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시민적 권리를 왜곡한다. 방역에 따른 직접적인 경제적 피해와 함께 전반적인 실물경기 위축과 언택트 경제가 초래한 고용축소로 취업률, 실업률 관련 지표는 외환위기 이후 최악이다. ‘방역예산’으로서 재난지원금과는 별개로 존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킬 국가의 책무가 그 어느 때보다도 요청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의 책무는 앙상한 재난지원금으로 쪼그라들었다. 존엄한 삶에 대한 시민들의 사회적 권리는 민주당과 기재부라는 기만적 대립구도가 만들어낸 보편/선별 프레임 속에서 ‘자격’을 갖춘 시민들 사이의 제로섬 게임이 된다. 재화의 생산과 유통, 소비를 조직하고 부를 축적하는 ‘자본’에 대한 개입과 통제 없이 ‘가능한 재정범위’라는 정부 여당의 호의에 기대야 한다. 여기에 ‘권리’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하더라도 이는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나 개입이 아니라 정부를 향한 개인들의 ‘청구권’에 가깝다. ‘정부가 OO를 쏜다’, ‘월급쟁이는 제외한다더라’, ‘누구는 얼마를 받는데, 왜 우리는 이것만 주느냐’는 식의 재난지원금 관련 보도는 이런 상황을 정확히 반영한다.

 

‘권리’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정세균 총리는 자영업자 손실보상제의 근거로 헌법상 권리인 재산권 보호를 주장한다. 방역에 따른 손실보상이라는 당연한 조치조차 신성한 재산권의 외피를 둘러야 힘이 실린다. 이재명 지사는 기본소득을 국민 기본권이라고 한껏 추켜세우는데 ‘자본’에 대한 최소한의 통제인 증세는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고 한다. 소유권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투표권을 모을 수 있는 수준에서 남발되는 권리들이다. 재난지원금의 정치는 사회공동체가 직면한 재난과 경제적 구조의 문제를 정부를 향한 개인들의 청구권에 기초한 제로섬 게임으로 만들어버렸다. 어떤 요구를 누구에게 할 것인지 그 한계가 이미 정해지고 구획된 권리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전망과 힘을 조직할 수 없다. 새로운 관계와 구조가 아닌 현 체제에서 각자에게 합당한 몫을 요구하는 권리만 남게 된다.

 

어떤 권리가 필요한가

 

코로나19는 현대사회의 숱한 문제들이 오직 사회적 수준의 대응과 대안을 통해서만 해결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웠다. 우리가 1년 넘게 경험하고 있는 방역은 물론이고, 폐업과 실직과 같은 생계위기 속에서 ‘개인’은 무력하다. 사회적 관계망과 연대를 복원해야 할 정치는 오히려 소유권에 기초한 권리를 통해 무력한 ‘개인’을 생산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존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사회적 관계와 연대의 힘을 통해 ‘사회적 권리’를 조직해야 한다. ‘자본’에 무력한 제도권 정치가 허구적인 ‘사회’를 강조한다면 사회적 권리로 조직된 힘은 사회 공동의 부(富)인 ‘자본’을 겨냥한다. 자본의 이윤축적에 종속되어 삶의 필요와 생계를 포기하는 게 아닌, 사회 공동의 부(富)를 통해 사회적 필요와 삶의 존엄을 함께 조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