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의 편지

어느 산골 소년의 중식 사랑 이야기

뜬금없지만 제 이야기를 시리즈로 써볼까 합니다. 사랑방에서 활동하다 보면 아무래도 글을 써야 하는 일들이 종종 생기는데요. 늘 일로써 글을 쓰다 보니 글 쓰는 일 자체가 즐겁지 않아지더라고요. 그런데 저도 즐겁지 않게 글을 쓰면 읽으시는 분들도 즐겁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재미를 위한 글쓰기를 해보려고요. 사람사랑에 조금 더 다양하고 재미난 이야기가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당황하지 마시고 1편 재밌게 읽어주세요.

그런데 말입니다. 활동가의 편지를 보통 6~7개월에 한 번씩 쓰니까 다음 2편은 내년에 만날지도 모르겠네요. 모두가 까먹을 때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상임활동가 디요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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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중국 음식을 좋아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기억이 있을 때부터 무척 좋아했다. 식성은 닮는다고, 아버지도 자취하던 시절에는 중국 음식을 너무 좋아해서 직장 앞 중국집에 자체 식권을 끊어보려고 하셨단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어머니도 중,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중국 음식을 자주 드셨다고 한다. 군것질을 싫어하는 할머니의 잔소리를 피하려다 보니 그 돈을 모아 친구들과 중국 음식점에 갈 일이 늘어났다고.

그렇다고 내가 어릴 때부터 온 가족이 매일같이 중국 음식을 먹으며 중식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랑과 사랑이 만났는데 어째서 결론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일까. 아버지가 가부장을 자임하는 순간부터 언제나 집밥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중식을 먹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군것질을 싫어하시는 할머니를 계승, 자체 발전시키며 결혼 이후부터는 중국 음식도 군것질의 범주에 포함하셨다. 결론적으로 양친의 중식 사랑은 나에겐 전설 같은 이야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와 중식은 애틋해졌다.

어린이가 기름지고 달큰한 음식에 빠지는 일이 당연한 것만큼이나 중국 음식에 빠지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파티가 열리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는 무엇이 먹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 아무리 중식 메뉴를 이야기해도 주방을 기름 범벅으로 만드는 중국 음식이 쉬이 식탁에 올라오지 않았다. 어린이도 1인 1짜장면을 끌어안고 그 앞에는 어린아이의 얼굴 두 개보다 더 큰 탕수육 대 사이즈를 두고 먹을 수 있는 날은 어머님들의 모임이 성사되는 날이었다. 그날만큼은 각 집안의 어린이들이 모두 모여 왁자지껄 떠들고 뛰어다니는 파티가 열렸고, 그 파티를 채우는 중국 음식은 맛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만 어린 시절을 쭉 보냈다면 나에게 중국음식은 유년기 시절에나 좋아하던 음식들 정도로 잊혔을지도 모른다. 나의 부모님이 그렇듯 말이다. 반전의 계기는 어린 나의 눈치 없음이 만들었다.

 

“너는 어떤 음식이 가장 좋아?”

“탕수육이요!”

“그럼 엄마가 해준 음식이 맛있어~? 탕수육이 맛있어~?

“탕수육이요!”

 

어머니가 기대한 답이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용돈이 적은 어린이라 할지라도 주머니 100원짜리 2~3개는 기본이었다. 누구는 등굣길에 학교에 도착하기 전부터 문구점 앞 오락기에서 동전을 다 써버리기도 했고, 또 다른 누구는 방과 후까지 고이 모셔두었다가 쌓인 스트레스를 풀듯 문구점 쇼핑을 했다. 나는 못 했다. 불량식품도 싫어하고 길에서 뭔가를 먹는 것도 싫어하시는 어머니는 나의 식습관을 위해 단 한 푼도 쥐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돈 대신 건강한 식사와 간식을 직접 제공하는 방법을 택하신 것이다. (내가 간식을 원할지, 오락을 원할지 묻지 않으셨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지극정성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한 시골집 식탁에는 주황색 계란이 유정란이란 이름으로 부정기적으로 올라왔다. 수급이 원활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여기에 누구네 집에서 직접 키운 콩으로 만든 콩국수, 할머니 집에서 가져온 메주로 만든 된장, 손이 참 안가는 못생긴 과일들까지. 농산물의 상품성, 즉, 모양이 무척이나 중요했던 당시 시골에서는 상상하기 힘들던 유기농 식재료들이 식탁을 채운 것이다. 게다가 간식까지도 집에서 만들며 아이스크림, 요구르트는 늘 냉장고 안에 있었다. 어머니는 기계가 없어도 계란 거품을 만들며 우리밀 베이킹에도 도전하셨다. 그런 어머니께 나는 중국집 탕수육이 더 맛있다고 한 것이다.

어머니는 호승심이 있으셨다. 아이를 나무라기보다는 이겨보는 길을 택한 것이다. 집에 있던 검정색 작은 냄비가 원래 튀김 냄비였는지 그 때부터 튀김 냄비가 된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즈음이었다. 집에는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튀김 잔치가 열렸다. 어머니는 먼저 돼지고기를 튀김옷에 입혀 튀기셨다. 그리고 다시 물으셨다.

 

“어때 맛있지?”

“네~!”

“중국집 보다 맛있지?”

“...아니요.”

 

다음에는 소고기를 튀기셨다. 소고기는 더 좋은 재료니까 맛있지 않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나 탕수육의 ‘육’은 돼지고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무엇보다 집에서 만든 튀김이, 그것도 건강을 포기하지 않은 튀김이! 중식당의 커다란 냄비에서 펄펄 끓는 기름에 첨벙하고 담겼다가 건져 올린 튀김의 바삭함을 흉내 낼 순 없었다. 설탕이 핵심인 소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맛은 점점 탕수육과 멀어졌다.

입맛이 형성되는 시기는 태어나면서부터 7세 즈음 까지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이 모두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10세 이후부터 어머니의 탕수육과 중식당의 탕수육을 번갈아 가며 먹었고, 나의 입맛은 그때 형성되었다. 탕수육은 더 이상 파티 음식이 아니라 미식의 대상이었고, 나와 중식은 다른 음식 종류보다 조금 더 가까워졌다.

이제 어머니는 어머니의 중식으로 나를 설득하려 하지는 않으신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승부에서 졌다고 볼 수는 없다. 나는 어머니의 의도대로 과자도 잘 사 먹지 않고, 길거리에서 군것질도 즐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다만 여전히 나는 탕수육과 중식을 좋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