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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

평일에는 대부분 밤이 늦어서야 집에 들어갑니다. 저녁에 회의나 모임 등 일정이 있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은 뒷풀이까지 이어지는데, 뒷풀이를 뿌리치고 집에 돌아올 만큼 의지가 강하지 못하거든요. 물론 남은 업무가 많아 야근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특히 인권으로 읽는 세상을 쓰는 주에는 한 주 내내 제발 막차라도 탈 수 있기를 기도하곤 합니다.

 

주말 약속을 마음 편히 잡지 못한지도 꽤 됐습니다. 집회나 행사가 대부분 주말에 열리고, 안 그래도 평일에는 잘 쉬지 못하니 적어도 주말 하루는 푹 쉬고 싶기 때문입니다. 잠도 많은데다가 체력이 없어 쉽게 지치곤 하니 대외 활동과 친목 관계에 애로사항이 꽃피고 있어요. 예전에는 ‘살 빼야 하는데’라고 되뇌었다면, 지금은 ‘체력을 길러야 하는데’라고 되뇌며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물론 다짐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듯합니다.

 

주말에 집에 있을 때에는 주로 청소나 세탁 등 가사를 합니다. 그날그날 컨디션이나 기분에 따라 화장실의 물때를 닦거나 색깔별로 나눠 수건을 삶거나 창틀에 쌓인 먼지를 치우기도 해요. 평일에는 집에서 밥 먹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주말만이라도 집에서 식사를 만들려고 합니다. 대단한 요리를 하는 건 아닐지라도, 한 끼 식사를 차려내는 노동은 굉장히 직관적인 뿌듯함을 주는 일인 것 같아요.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에는 뭘 하냐면, 스스로가 충전기에 연결된 휴대폰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제 방 침대에 누워서, 실제 충전기에 연결된 휴대폰으로 유튜브 영상 등을 뒤적거리거나 노래를 듣습니다. 그렇게 주말을 지내고 난 월요일, 사무실에서 누군가 이번 주말에 뭐 했냐고 물어보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

 

최근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요즘 뭐 하고 지내?”라고 물었는데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꽤나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는데도 정작 뭘 한다고 이야기할 단어가 없더라고요. 활동가라는 직업의 특성도 있는 듯한데, 활동가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짧고 명확하게 표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회의를 하고, 글을 쓰고, 집회나 기자회견이나 토론회 등등을 기획하거나 준비하거나 참여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 모든 시간들이 모여서 무엇이 되어가는지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친구에게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지내는지 설명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떠오른 건, 오히려 제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 시간이었습니다.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어디 가서 말한 적은 없지만, 사실 저는 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을 굉장히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충전 방법을 가지고 있듯이, 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일을 해나가기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았다’의 줄임말 같은 건데요. 자기 계발과 취미 생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요소고, 끊임없이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라고 요구받는 세상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은 약간의 죄책감과 알 수 없는 민망함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제가 이런 사람인걸요.

 

올해를 시작하며 혼자서 마음속으로만 작은 목표를 세웠어요. 바로 ‘잘 쉬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제 안에서 꿈틀거리는 죄책감과 민망함을 덜어내고, 왠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을 다스리며, 제가 사랑하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을 지켜내는 한 해를 만들어보려 합니다. 응원해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