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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잔인한 이야기

‘설날 잔치에 쓰일 돼지 한 마리가 도착하는데 네가 잡아라.’ 10여 년 전 제가 군인이던 시절, 위에서 이런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돼지를 잡아 본 적이 없어 난감하기는 했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윽고 저녁, 트럭이 도착하고 돼지를 끌어내리려고 트럭위에 올라갔을 때... 웬 하마 한 마리가 네 발이 묶여진 채 비장하고 처절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 커다란 돼지는 강하게 몸부림치며 저를 비롯한 장정들의 손을 밀쳐내며 저항했고, 귀청이 떨어져나갈 듯한 비명소리에 마치 사람을 죽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 돼지의 두 눈을 천으로 가리고 입에 재갈을 물린 채, 돼지를 철봉위에다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냥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영하 30도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다시 저는 기어 나왔고요. 얼어 죽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지쳐 죽일 생각이었습니다. 아침에 나와 보니 예상대로 무기력해진 돼지 한 마리가 있었고, 쉽게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2년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회사 앞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올려다 본 TV에서는 촛불집회가 한창이었고, 광화문에 컨테이너박스가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돌린 채 사장님 의 훈화에 정신이 쏟으며, 뉴스는 듣지 않았습니다. 포만감에 이를 쑤시며 회사로 들어가 세상의 70%가 본다는 조중동 신문의 기사를 스크랩하며 평온한 일상을 마무리합니다.

1년 전부터 저는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영화제의 반상근활동가로서 사무실에 앉아있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것처럼 일부러 컴퓨터 엑셀 화면에 눈을 떼지 않았지만, 사랑방의 옆자리, 뒷자리, 건너편 수많은 자리에서 수많은 인권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기륭의 투쟁, 용산참사, 쌍용차투쟁의 과정들을, 저는 국가의 폭력과 자본주의의 만행에 눈을 가리고 귀를 닫은 채 있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방 안에서 그 문제들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저항하고 있는 수많은 활동가들의 모습과 인권영화제를 청계광장에서 개최하기 위해 수없이 토론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던 인권영화제 활동가들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면서 인권운동은 지식과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에 대한 용기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곤 합니다. 

저는 이제 인권영화제 반상근활동가에 다시 자원활동가로 활동할 예정입니다. 10여년 전 겨울밤 돼지처럼 야만의 역사 앞에 무기력하게 지쳐서 내 피와 땀과 살을 내어줄지, 아니면 저항할 것인지, 사실 어떻게 걸어갈지 아직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1년 동안 보아왔던 인권운동사랑방과 인권영화제의 모습으로 그 용기의 모습을 직접 보아온 저로서는 가슴 속, “지지 않겠다!”라는 다짐으로 세상 속을 뛰어가고자 합니다. 

1년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영화제에서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