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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너무 소소한 이야기

낮잠을 자려고 큰 회의실에 들어가 누웠다. 날은 따뜻하지만 그늘진 곳 바닥은 차다. 저쪽 보이는 담요를 깐다. 전화기 소리, 파쇄기 소리,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는데, 짧은 시간 든 잠에서 꾼 꿈, 또 사무실이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고,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 하고 있고, 난 큰 회의실에서 잠을 자다 깨서 어기적어기적 내 자리로 나와 앉았다. 뭔가 민망해하고 있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인쇄소 전화다. 어젯밤에 넘겼던 ‘장수마을 소식지’ 인쇄를 마쳤고, 지난 주 심혈을 기울여 만든 청소노동자 노동인권 소책자에 난 아쉬운 오타를 수정하기 위한 스티커도 나왔다는 것. 이따 찾으러 가겠다고 말씀드리고 잠이 아쉽지만 일어난다. 꿈에서처럼 어기적어기적 내 자리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정신을 차리려고 커피를 타 마시고, 큰회의실에 한 개 남아있던 마가렛뜨 과자를 먹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마가렛뜨지만 사무실에서는 귀하다. 그저 나의 식탐일지라도. ^^:) 꿈에서처럼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옆자리 명숙은 오늘 자리 정리를 하려고 큰맘을 먹었는지, 몇 차례 종이뭉치를 파쇄하더니 확실히 자리가 깨끗하다. 앞자리 미류는 내일 발간될 인권오름 편집으로 정신이 없고, 대각선자리 은아는 표현의 자유를 위한 새로운 연대체 논의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확인하고 있다. 건너편 영화제팀 일숙과 은진도 한 달 정도 남은 인권영화제 준비로 바쁜 것 같다. 컴퓨터와 마주하는 시간이 가장 길지만 여기저기 이래저래 오가는 이들의 대화에서 웃음소리도 난다. “허허”, “크크”부터 웃음소리도 참 다양하다.

오늘은 점심식사 당번이었다. 요즘 식사당번이 되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어떻게 김치를 써볼까이다. 겨울에 사랑방 사람들, 들 사람들(옆 방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들)이 함께 날 잡고 열심히 담근 김치, 그런데 수도 동파로 한동안 식사를 해먹질 않았더니 그 사이 너무 푹 익었다. 한켠에 자릴 차지하고 있는 오래된 김치냉장고는 한 쪽은 아예 안 되고 나머지 한 쪽도 문제가 생겼는지 그 안에 넣어두었던 김치 상태도 심각하다고 한다. 김치콩나물국을 끓이기로 하고, 포털에 김치콩나물국이라고 쳐본다. 레시피를 참고하느라 부엌과 내 자리를 왔다갔다 하면서 어렵게 끓였다. 상임활동가로 사랑방을 드나든 지 3년, 그래도 2주에 한 번 꼴로 돌아오는 식사 준비는 늘 어렵다. 그래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보다는 했던 것, 좀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것을 주로 하는 편인데, 한동안은 김치를 이용한 음식들을 연구해서 시도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영화 ‘식객 2’를 볼까도 생각 중이다.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지만, 식객2 부제가 김치의 전쟁이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어 2011년이라는 말이 낯설기만 했는데 어느덧 4월이란다. 3월, 때 아닌 눈비도 내리고 너무 추워서 언제 봄이 올까 싶었는데 어제 문득 집 앞 골목에서 절정의 꽃잎을 펴기 직전인 듯 목련이 몽글몽글 오무려져 있는 걸 보았다. 무엇에 향하는지도 모를 기특하고 반가운 맘이 들었다. 사무실 입구 누군가의 책상에 올려놓은 후리지아 꽃에서도, 창가에서 힘들게 겨울을 나고 다시 새싹을 틔우는 화분들에서도, 숨가쁘게 언덕을 올라 도착한 사무실, 사람들이 툭 내뱉는 ‘덥다’란 말에서도 봄은 이미 와있나 보다. 뭔가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 든다. 올해 다시 보게 된 총무 업무도, 작년부터 함께 하고 있는 청소노동자 권리 캠페인(따뜻한 밥 한끼의 권리 캠페인) 활동도, 2008년부터 드나든 성북 장수마을에서의 대안개발연구모임 활동도, 하루의 대부분을 한 공간에서 같이 보내는 사랑방 사람들과의 관계도. ‘활동’보다는 ‘생활’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인권운동사랑방에서 그렇게 오늘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