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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유령 같던 삶이 실체가 되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조선일보를 애독하며 축적해온 전라도와 운동권에 대한 편견을 수정하게 된 계기는, 대학 새내기 시절 읽은 어떤 PC 통신 소설 때문이었다. 70년대 말 학번으로 운동권으로 살다, 군대에서 80년 광주를 진압군의 입장에서 겪고, 이후 노동운동을 하다 접은 작자의 경험을 접하고선, 나는 더 이상 편견을 고집할 수 없었다. 첫 투표권을 김대중 씨에게 행사했고, 그의 당선을 보며 뿌듯해했다.

대학시절 내내 나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게임을 하거나, 180도 바뀌어버린(?) 가치관을 갖고 PC통신 게시판을 들락거리며 싸움질만 하고 다녔다. (인권하루소식을 처음 접한 건 당시 드나들던 PC 통신 게시판에서였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은 2002년 월드컵과 촛불시위, 유시민 씨가 만든 개혁당에의 가입과 탈퇴, 노무현 씨 당선, 탄핵정국 등을 거치며 결국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정치적 외양은 많이 바뀌었지만 실제 삶의 모습은 변한 것이 없었다.

20대가 저물어가는 마당에, 여전히 삶을 낭비하고 있다는 강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몰랐다. 남들처럼 사회적 성공을 향해 달려가기에도 나는 너무 게을렀고 또 그런 것들이 충분히 만족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좁디 좁은 인간관계 속에서 혼자가 익숙한 지 오래된 나는 메말라 있었다. 나는 도움이 필요했고, 그래서 독특한 이름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던 인권운동사랑방을 골라 자원활동가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처음 자원활동을 시작하면서, 동기를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뭔가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라고 말했지만 실은 나 자신을 바꾸고 싶어서라는 것이 더 정확한 이유다. 그리고 지난 6개월간, 유령 같던 내 삶이 실체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경찰의 행동을 직접 겪으며 느끼는 분노와, 다리를 막기 위해 쌓아놓은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들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PC 앞에선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미래소년 코난'에 나오는 '인더스트리아'처럼 생긴 초고층 아파트 단지가 내려다보는 강변에서, 추운 밤 사수대와 전경들이 피 흘리며 서로 때리는 광경을 뒷걸음치며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던 내가 얼마나 무력한지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던 예전에 비해, 같은 뜻을 지닌 사람들과 무언가를 준비하고 함께 행동하고, 설사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에 실망하더라도 같이 실망하는 지금이 더 좋다. 지금은 비록 늘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있지만, 형편이 허락하는 한 계속 활동을 하며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