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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정O 아저씨께

안녕하세요? 인권운동사랑방의 성진이에요.
여름의 더운 열기가 스멀스멀 밀려오던 6월, 의료급여제도에 관한 아저씨의 생각을 듣고 싶다며 찾아 뵜던 명숙씨와 저를 잊지는 않으셨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인터뷰 섭외가 사전에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아저씨 입장에서는 분명한 정체(?)도 모르는 안면불식의 저희가 적잖게 뜬금없고 불편하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도 아저씨께서는 저희를 맞이하시겠다고 공공근로까지 일찍 마치고 오셨었잖아요. ‘저희 때문에 퇴근 일찍하셔서 어째요?’라는 말에 ‘쉬엄쉬엄 일하면 되지’라며 선하게 웃으시던 아저씨셨는데, 인터뷰 마치고 너무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감사의 인사만 드린 것 같아 뒤늦게 죄송한 마음이 드네요.

저희는 그 인터뷰 후에도 몇 번 더 동자동을 찾아갔었답니다. 쪽방 건물 앞에서 아저씨께 유인물을 드리기도 했었잖아요. 아저씨께서는 한 번도 오시지 않으셨지만 건강권 배움터도 진행했었고, 바뀐 의료급여제도를 반대하는 기자회견도 했었답니다. 몇 분 되지는 않았지만 아저씨 같은 수급권자 분들 모셔서 증언대회도 했었구요, 선전전도 진행했었어요. 얼마 전에는 동자동에서 인터뷰한 내용들을 가지고 건강권 보고서도 만들었어요.

그런데 말이죠, 아저씨.
저희가 나름대로 동자동 쪽방촌 주민 분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권이 실제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했지만요, 저에게는 내려놓기 힘든 짐으로 남아 늘상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게 하나 있어요. 저희가 만나 뵜었던 동자동 주민 분들과의 관계 때문이랍니다. 물론 아저씨도 포함되구요. 한두 번 만난 사이밖에 안되는데 좋아하는 사람한테 어렵게 털어놓는 고백같이 왠 닭살 돋는 이야기냐구요?^^
사실 저는 인권운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구요, 그래서 ‘운동’이라고 부르기에도 낯부끄럽답니다. 그런데요, 인권과 관련한 활동을 몇 달동안 하면서 든 생각이 하나 있다면요,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권이 실현되기 위해선 정책이나 제도도 바뀌어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낙인찍기도 사라져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직접적으로 억압받고 고통받는 당사자들이 누구나 마땅히 지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지키기 위해 그 가치를 훼손시키는 제도와 세력에 대해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역사적 인식이었어요. 저도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하지만, 노예해방이 그러했고, 흑인 인권 운동이 그러했대요. 또 여성의 권리를 이렇게 공적인 영역에서 주장할 수 있게 되기까지도 수많은 여성들 피와 눈물이 있었대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의 활동도 의미 있겠지만 동자동 주민 분들의 당당한 외침이 사회적으로 더 큰 울림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아저씨께 기자회견도 같이 가자고 제안드리고, 증언대회 자리에서 발언을 해보시라고 제안드렸던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제안들을 아저씨나 주민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하기가 어려웠어요. 더군다나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냐는 냉소를 보이시거나 곤란해 하시며 난색을 표하실 때는 참으로 난감했어요. 건강권 배움터 3강이었을 거에요. 찾아오신 주민 분 한 명 없이 시작시간을 훌쩍 넘겨버렸지만 서운함 말고는 저희에게 허락된 마음은 없었답니다. 눅눅하고 냄새나는 방에서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하는 아저씨 마음이 어떨지, 건더기 하나 없는 국물에 밥을 말아 저녁을 해치운 하루를 정리하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실지, 뜨끈뜨끈한 방에서 고기 반찬으로 포식할 수있는 저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들잖아요. 그런 제가 어떻게 아저씨께 ‘권리’가 어쩌고, 당사자가 어쩌고 떠들 수 있겠어요. 그래서 난감하고 막막하고 또 아저씨가 불편하고 어렵고...... 그래요.

그래두요, 일단 뛰어들었구, 아저씨나 주민 분들과 이제 조금 친해졌는데 여기서 그만두고 싶지는 않거든요. 막막하고 어려운 건 맞는데 그렇다고 그만둘 만큼 지친 건 아니에요. 좀 더 인권 활동 계속 하면서 저보다 내공깊은 활동가들에게 조언도 듣고 토론도 하다보면 엉켜있는 생각의 실타래 풀어 다시 가지런히 정리할 수 있지 않겠어요? 저희 동자동 가끔가면 반갑게 맞아주시고, 활동 열심히 하면 맞장구도 쳐주고 그래주시면 좋겠어요^^

손바닥 뒤집듯 날씨가 순식간에 변해버린 것 같아요. '감기 조심하세요'란 말, 남의 속도 모르고 성의 없이 뱉어내는 인사치례 같아서 할까말까 고민되네요. '어떻게 조심할 수 있겠냐'고 물어오시면 전 대답할 말이 없거든요. 그래도 저의 무리한 바램이려니 하고 넉넉하게 받아주세요. 감기 조심하시구요, 다음에 또 찾아뵐께요.

인권운동사랑방 자원활동가 조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