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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논하는 건강권

‘건강권서울시민회의’ 시민패널로 초대합니다!

옷깃을 여미고, 머리는 모자 밑으로 쏙~독감 주사 맞으러 가는 바쁜 사람들. 예년보다 빨리 다가온 겨울에 혹여나 아플까, 건강을 잃을까 사람들은 모두 나름의 대비를 하고 있다. 돈이 있건, 없건 건강은 사람들의 관심이다. 건강을 잃으면 하고 싶은 것들도 하기 어렵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만나기 힘들어지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최소한의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를 서로서로 기원해준다.

국제인권규약(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도 건강에 대한 권리는 인권의 한 목록으로 들어가 있다. 또 건강권에 관한 사회권위원회 일반논평14에서 건강권은 다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바탕이 되는 권리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아직 건강권을 인권으로서 접근하는 일은 낯설다. 특히 건강권에 대한 두 가지 오해 속에서 건강권을 어떻게 보장받고 지켜나갈지 갈팡질팡 할 때도 많다.

하나의 오해는 건강권을 보건의료나 의료상품에 대한 권리로 협소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건강한 삶은 의료혜택만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정기적인 검진과 진료, 치료 외에도 위생, 영양, 건강한 일터, 차별 없는 사회분위기 등 건강한 삶의 조건이 보장돼야 가능하다. 건강권을 의료접근권으로 협소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마저도 가난한 사람들은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른 오해는 건강권을 건강할 권리로 오해하는 것이다. 만약 건강권을 그렇게 이해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질병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건강권의 완전한 실현이고, 그에 따라 사회는 의료기술의 확장에만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유전적 조건과 문화가 다르기에 이는 불가능하다. 또한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미 병을 얻은 상태인 만성질환자나 난치성 환자는 건강권을 보장받을 길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국제인권규범에서 건강권이란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으려면 그/녀가 병이 있건 없건 간에 건강한 삶의 유지를 위한 돌봄(의료적 돌봄을 포함한 것으로 right to healthy care)과 건강할 수 있는 조건(right to healthy conditions)에 대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본다. 질병이 있더라도 그에 필요한 적절한 의료와 돌봄, 차별 없는 사회분위기가 있을 때 병이 (더 악화되지 않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건강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시도

이렇게 낯선 ‘건강권’을 서울시민들이 논하는 자리가 준비되고 있다. 바로 <건강권에 관한 서울시민회의– 서울시민, 건강권을 선언하다! 쪽방 주민의 삶을 중심으로>(약칭 건강권서울시민회의)이다. 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서울시민 전체의 건강권에 대한 진단과 권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쪽방 주민의 삶으로 한정되어 있다. 범위나 대상이 한정되어 있으니 더 낫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쪽방을 경험하거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쪽방 주민의 건강권을 논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쪽방 주민들의 건강 및 생활 상태와 인권기준 등에 대한 충분한 정보제공을 하겠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혹여 쪽방 주민을 대상화하지는 않을까 우려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건강권서울시민회의’는 건강권을 삶의 영역으로, 인권의 영역으로 한발 가깝게 하는 일이기에 필자도 조정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인권은 모든 사람들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건강권서울시민회의’는 국제인권체계가 기본적으로 설정하고 있는 인권에 대한 청구권적 모델에서 한발 나아가는 시도이다. 다시 말해 인권 보장의 의무주체인 국가에게 권리주체인 시민들이 인권보장을 청구하는 방식에서, 사회구성원이 인권 보호 의무를 행사하기 위해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함께 건강권에 대해 논의하고 필요한 권고를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시민들이 건강권 실현의 의무주체로 서게 되기 때문이다. (건강한 삶에 필수적이자 인권의 다른 말인 ‘관계맺음’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지는 않을까하는 섣부른 기대도 해본다.)

나아가 국제인권규범에서 강조하는 인권 관련 정부정책 결정 과정에서 당사자들을 포함한 개인 및 집단의 참여를 실현하는 모델이기도 하다. 자유권이든 사회권이든 국제인권규범에서는 권리와 관련된 정책을 결정할 때는 정책에 영향을 받는 사회구성원의 참여를 보장할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한 과정이 수행되고 있는 영역은 매우 협소하다. 그나마 대규모 국책사업에서 해당 주민의 의견을 청취하는 과정을 거치도록 하고 있지만 밀양 송전탑 건설이나 제주 강정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보이듯이 형식적이다. 그래서 ‘건강권서울시민회의’가 논의한 내용을 지방정부인 서울시에 권고하는 형태를 띤 이번 시도가 잘 되었으면 한다. 물론 당사자인 쪽방 주민의 참여를 이후 정책결정과정 모델에서 어떤 방식으로 남길까 하는 점은 아직 과제이다.

당신의 참여를 기대하며

그 외에도 기대되는 것은 건강권에 대한 전문가주의를 넘어서는 또 한 번의 시도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여러 번 있었다. 2008년 환자단체들이 모여 ‘환자권리선언’을 작성하였고, 작년 대선 때는 시민들이 ‘내가 만드는 건강공약’을 만들기도 했다. 이번에도 의사나 학자, 정책전문가들이 아닌,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이 쪽방 주민들의 건강을 심의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제도화된 건강관리체계에서 전문가들에게 독점되거나 의료산업에서 상품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건강’을 시민들이 논의하면서 어떻게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을 것인지, 어떻게 스스로의 힘을 키우며 건강권을 실현할 것인지 신선한 아이디어와 의견이 나오리라 기대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건강권을 토론하기 위해 시민패널로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하는 것과 다양한 나이와 성별, 신분 등의 고른 참여를 이루어내는 것은 ‘건강권서울시민회의’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쪽방촌 주민이 아닐 때 시간을 내어 참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고민이다.

그래서 필자는 야트막한 기대를 한다. 나의 삶이 타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여러 경험으로 또는 감으로 느낀 수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 쪽방 주민의 건강권에도 관심을 가질 거라고 말이다. 2011년 한진 중공업 희망버스 때 보여주었던 ‘연결의 힘’처럼 이러한 관심으로 인권은 악조건 속에서도 조금씩 진전했으니까. 또한 빈곤의 심화와 확대 속에서 건강하게 살거나 건강권을 보장받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폴 헌트 유엔 건강권 특별보고관이 2003년 보고서에서 썼듯이 “건강하지 못한 것은 가난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아픈 사람은 가난에 빠질 가능성이 더 많고, 가난한 사람들은 질병과 장애에 취약”하기에 쪽방 주민의 삶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누구나 병원 갈 때마다 줄어드는 통장잔고에 머리를 쥐어짜본 경험은 한번쯤 있을 테니 말이다.

끝으로 긴 글을 읽어준 분들께 고마워하면서도 부탁을 드린다. 주변에 ‘건강권서울시민회의’의 시민패널의 의미와 참여를 널리 알려주시기를 바란다. ‘우리’와 ‘인권’에 생명력을 넣어주는 것은 관심과 참여이다. ‘건강권서울시민회의’에 참여하는 일은 ‘우리’를 확장하고, ‘인권’을 채워가는 일이기에 함께 한다면 유익하고 즐거운 일이 될 것이라고, 말을 보태주었으면 한다.

덧붙임

명숙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이자 건강권에 관한 서울시민회의 조정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