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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다시 돋움활동을 시작하는 '아이'

3년만이에요.
다시 사랑방 활동을 시작 해보겠다는 얘기를 꺼냈습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말이죠.
직장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활동을 쉬면서도, 돌려줘야 하는 빌린 물건을 쓰고 있는 것 마냥 불쑥 무거운 마음이 걸리곤 했습니다. 가끔 잊지 않고 전화로 안부를 물어오는 사무실 활동가들과 통화를 끊고 나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당장 복귀가 곤란한 내 처지를 새삼 따지곤 했죠.
한 상임활동가에게 이런 말도 했었었죠.
`그냥 `휴직`말구 `활동 중단`으로 처리해주면 안돼? 나중에 `복귀`가 아니라 `재개`를 하는 걸로 하면 그동안 맘이 좀 더 편할 것 같은데...`
(돋움의 멤버쉽이 자원활동가의 그것보다 좀 더 긴밀하다보니 복귀 후의 배치나 수임 등을 고려한 주변 활동가들의 휴직처리 권유에 좀 더 강력하게 주장하지도 못했었죠.) 활동가 엠티나 송년회 자리에 얼굴을 슬쩍 들이밀고 두 세달에 한 번씩이라도 주번 역할을 하러 갔던 건 마치 빌린 물건에 대한 이자 정도를 갚아가는 마음같지 않았을까 싶어요.

직장에 있는 하루하루가 행복할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순전히 주변의 상황이나 요구에 등 떠밀려 억지로 하게 된 일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눈물을 대가로 보상을 얻는 일도 아니었으며 나름 보람도 있는 안정된 직장이었기에 일을 하기 위해 휴직을 선택하는 데 있어 내면의 갈팡질팡거림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해도, 물질적 성취나 욕망 앞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눈감아 버리지 않도록 나를 자극시켜주고 긴장시켜준 활동가들과 ‘인권’이라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가장 약한 사람들의 열망까지도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아니, 정확히는 ‘아쉬웠다기’보단 현장으로부터 멀어지는 만큼, 단조롭고 보수적인 조직질서에 적응해가면서 절박한 누군가의 비명과 절규에 둔감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너무 무거운 거 아니냐, 직장일을 하면서도 허락하는 만큼 놀러도 오고 활동 소식도 나누고 하면 되지 않느냐’

뭐 이렇게 물을 수도 있었겠죠.

되돌아보면 제가 활동을 근근이 이어올 수 있게 만든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자기물음은 가장 난감하고 맘이 무거워지는 숙제였어요. 어떤 내재되어버린 당위나 다른 활동가들과의 비교, 자기검열. 생각이 끝에는 늘 이런 것들에 다다르곤 했거든요. ‘~지 않기 위해서’의 부정형이 아닌 ‘~하고 싶어서’ 라는 온전히 내 것으로 속해있는 욕구나 바램에 대한 긍정형의 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근래 문득,
어쩌면 ‘내가 ‘~는 하면 안돼’ 라는 금지와 제재에 익숙한 인간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동기의 경험이 한 인간의 인격 형성의 전체가 될 순 없겠지만 요체가 될 수는 있겠다 싶어요. 그런 맥락에서 보면 사실 저는 (객관적인 진실과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제 기억에서 부모님으로부터 저란 존재 그 자체로 긍정되어지고 수용되어졌던 경험이 많지 않아요. 이 주관적인 기억은 부모님의 양육방식이 올바른 것이었느냐 하는 가치판단과는 무관한 것이지요. 어쨌든 저는 좀 더 그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 ’당위‘라고 받아들인 학업적 성취에 열중했었고 말하거나 행동해서는 안되는 것들을 체득하기 위해 애썼던 유순한 아이였거든요. 어쩌면 저를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이 제도교육 안에서 이런 방식으로 교육과 훈육을 받아오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런 삶의 태도와 양식이 여전히 어른이 된 지금도 일상과 관계의 여러 켜마다 재현되는 건 아닌가 싶었어요. `나란 존재 그 자체’만으로 존중받고, 유일하고 개별적인 인격체로 대우받는 경험은 내가 ‘무언가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어떤 존재로부터 ‘승인’을 얻게 되는 경험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한 인간의 깊은 마음속에 자기표상을 형성하게 되겠죠.

길지 않은 인권 운동의 경험을 통해 제가 종종 느끼는 막막함은 저를 포함한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자기표상과 관련이 있었어요. 우리는 자주 인권 현장에서 만나는 분들과 인권교육도 하고 집회도 열기도 했어요. 그걸 통해 차별이 조장되는 맥락이나 인권당사자 개인들을 둘러싼 어긋난 조건, 왜곡된 인권의 관점을 어떻게 인권당사자의 관점에서 다시 세워볼 수 있을 것인지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는 많은 인권당사자들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은 어떤 뿌리깊은 무력감, 열패감, 현재의 삶이 바뀌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었어요. 정신․신체적 장애나 경제적 곤궁, 나이의 어림, 성적 지향처럼 개인이 나태함이나 무능함으로 초래된 결과가 아니었음에도 이미 인권당사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현실에서의 차별로 인한 고통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라는 자책감, 이런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이 오랜 세월 동안 자리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장애인’, ‘노숙자’, ‘어린 것들’, ‘여자’, ‘동성연애자’, ‘동남아 사람들’ 이런 이름이 아닌, 고유하고 유일한 존재 그 자체로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았어야할 특별할 것 없는 대접을 그들이 경험했었더라면. 그런 경험과 관계들을 통해 내가 한 인간으로 존중받고 인정받고 있다는 당연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더라면. 막막하고 어려웠어요.

소외받고 약한 사람들일수록 더욱 강하고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을 자존감의 문제는 차별을 해소하는 법이나 노숙인 자활을 위한 제도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 낸다 해도 남겨지는 문제일 것 같았어요. 물질적 성취나 공적 지위에 대한 욕망만이 유일한 미덕이 되어버린 이 땅에서 아동들과 청소년들이 두려움과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있도록, 장애인과 성적 소수자들이 수치심과 모멸감을 갖지 않도록, 여성들이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는 게 될 터인데 말이죠.

솔직히 부채감 비슷한 걸 안고 활동을 다시 시작하는 게 잘 하는 건지 모르겠을뿐더러 활동을 내려놓는 동안 직장일로 몸이 고되긴 했어도 나름 비는 시간은 온전히 내 것이었고 머리 속을 가끔 텅빈 운동장처럼 두면서 지내기도 했었는데 활동을 다시 시작한다는 게 새로운 정신노동을 추가하게 되는 것 같아 복귀가 그리 흔쾌하지는 않아요.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다시 활동을 해보겠다고 한 것은 바로 그 `부채감` 때문이에요.

`부채감` 덜기 위해 활동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게 아니라 `부채감`이 아닌 다른 동기들로 활동을 해보고 싶기 때문이에요. 제 마음 안에는 ‘잘못한 거 없이도,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잘못이 예정된 것처럼 늘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어린 아이’가 있어요. 그 아이는 그 잘못으로 인해 내 존재가 부정당하거나 외면당할까봐 마음을 쓰며 애를 태우죠. 관심과 사랑을 받고 칭찬을 듣고 싶고 내 존재를 증명하려고 내가 원하는 것보다 다른 누군가가 원할 것이라고 짐작되는 바를 위해 노력하는 게 참으로 열심스럽습니다. 안쓰럽기도 하죠.

그래서 그 아이를 품고 있는 나도 늘 주변 활동가들에게 미안하고 그 이들만큼 활동에 매진하지 못하는 선택이 빚을 지는 것 같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내 존재가 인정받지 못할까봐 말이죠.

다시 시작하는 활동이 내 마음 속의 불안이나 두려움을 우리가 만나는 많은 인권당사자들의 마음 속에 자리한 무력함과 두려움과 만날 수 있게 하면 좋겠어요.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저는 그 시작을 내 안의 불안과 두려움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주는 유일한 미덕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중요한 것은 고통의 크기가 아니라 타인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하려는 진심이겠죠.

휴직 동안 주번활동을 하러 가끔 중림동 사무실로 가던 날은 대개 직장 퇴근 후에 가야해서 땅거미가 내려앉은 후에 사무실에 도착하게 되죠. 그 어스름한 시간에 오르막길을 걷는 걸음은 점점 그 속도도 더뎌지고 무거워지기만 했습니다. 얼마 전 중림동에서 옮긴 창천동 사랑방의 사무실도 오르막길을 끝에 있습니다. 몇 번 오르지 않은 오르막길의 발걸음이 여전히 무겁습니다. 한동안도 그렇겠지요. 앞으로 자주 오르게 될 텐데 찬찬히 그 걸음의 무게를 느껴봐야겠습니다. 어쩌면 허위일지도 모르는, 스스로를 제약하는 외부의 잣대에 맞추려는 강박적인 내면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질수록 그만큼 오르막길을 오르는 발걸음도 가벼워지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