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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존엄한 죽음에 다가가기 위해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 81세, 건강수명 70세라고 합니다. 약 11년을 건강하지 못한 조건에서 노령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물론 통계이니, 개인별로 다양한 차이가 존재할 겁니다. 하여튼 죽기 전까지 약 10년의 삶은 질병 등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의 보살핌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통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는 가족일 수 있고, 의료인과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등 전문가 집단일 수도 있습니다.

마흔을 훌쩍 넘긴 제 또래 사람들은 누군가를 부양하거나 보살피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조건입니다. 물론 이것도 개인차가 분명 존재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를 하면, 저는 70대 중반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고 어머님이 왼쪽 편마비 장애인입니다. 작년 12월 초 폐렴예방주사를 맞은 엄마는 심하게 열과 몸살을 앓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독감예방 주사를 맞듯이 생각했다가, 39도에 이르는 고열을 앓고 있는 엄마 상태를 겪으면서는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물론 보건소 담당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감기기운을 느끼고 몸살이 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막상 비가 오는 토요일 늦은 오후에 열이 오르니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열을 내리는 아동용 시럽을 먹고 나서야 괜찮아졌지만 몸살이 와서 예전처럼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 가는 것이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태가 한 달 정도 지속하다가 지금은 엄마 혼자서도 화장실을 잘 다닙니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인간 스스로 화장실을 갈 수 있다는 것은 존엄한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역시 매우 소중합니다. 공교롭게도 12월 주말은 워낙 일들이 많아서 사실 엄마를 돌보기 위해 저는 물론이고 아빠, 여동생, 제부, 조카까지 총동원되었습니다. 조금씩 시간을 내어서 릴레이 돌보기를 했습니다. 가족 안에서 돌보는 일이 힘들 때에 엄마가 요양원에 갈 수도 있겠구나, 라고 처음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는 요양시설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엄마를 요양원에 보낼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기대수명을 기준으로 부모님은 약 6~7년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죽음에는 순서가 없기에 당장 저에게도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부모님에게 삶을 정리하는 시간(유언장을 쓰거나 자서전을 쓰거나 등등)을 가져보는 것은 어떠냐고 가볍게 이야기를 던졌습니다. 아빠는 펄쩍 뛰며 다시는 이야기 하지 말라 하고 엄마는 생각을 해보겠다고 합니다.

제가 지금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병들어 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치료를 받고 싶은지? 죽기 전까지 누구와 어디서 살고 싶은지? 죽어가는 순간에는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임종을 맞이하고 싶은지? 생명연장과 같은 의술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 이번 생을 정리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남기고 싶은지?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죽음에 이르는 길에서 미리미리 해야 하는 숙제를 우리 모두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당장 저 역시 위 질문에 얼마나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올해 우선은 두 가지를 해보려고 합니다. 유언장을 쓰는 일과 어떻게 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일입니다. 다음 상임활동가 편지를 쓸 무렵, 살짝 제 유언장을 공개해 볼까요!!! ㅎㅎ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이는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다. 그런 용기를 갖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로 그 진실을 직면하기를 꺼린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용기가 있다. 바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 …

… 질병과 노화의 공포는 단지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니다. 그것은 고립과 소외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돈을 더 바리지도 권력을 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가능한 한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대해 직접 선택하고, 자기의 우선순위에 따라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중에서(아툴 가완디 지음/ 부키 출판사)

다큐멘터리 <목숨>을 보면, 사람들은 죽어가는 과정에서도 혹은 죽음 직전까지도 자신의 자잘한 욕망과 본능에 끌려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목숨>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인데요. 평소에 식탐이 많았던 한 환자는 암의 고통으로 인해 먹을 수 없자 음식방송을 보면서 죽어갔다고 하더군요. 평소 살던 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게 대게 많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삶을 성찰할 줄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죽음을 앞두고 성찰하지는 못한다는 거죠. 그렇지만 그저 살던 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늙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가 맞이해야 할 또 다른 삶의 모습을 찾는 일이 저 개인에게나 우리 공동체에 꼭 필요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