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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의 인권이야기] 오래된 미래

참 오래전에 중학생 20명을 데리고 인권캠프를 갔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캠프 마지막 순서는 모둠별로 인권나무를 그리고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그중 마지막 모둠이 기억에 남는다. 다른 모둠들의 나무는 뿌리-기둥-줄기-잎의 정형화된 형상인데 반해, 마지막 모둠은 얽히고설키어 있는 넝쿨의 형상이었다. 인권을 수직의 위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의 얽힘으로 그려냈다. 권리들의 관계, 사람들의 관계로 인권을 설명하는 그들이 참으로 빛나 보였다. 그렇다. 관계가 사라지면 사람, 사람다움이 설 자리가 없다. 人間-사이존재라 하지않던가.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마을’, ‘공동체’, ‘풀뿌리’를 말하기 시작한 것도 관계에 대한 목마름일 것이다.

출처: 이윤엽 작가

▲ 출처: 이윤엽 작가

삶이 힘들어질수록, 생존의 절박함이 무겁게 짓눌러 숨쉬기 버거울수록 ‘마을’, ‘공동체’, ‘풀뿌리’란 단어가 사람들 사이를 떠돈다. 혼자 아닌 여럿이면 숨쉴 수 있을 것 같고, 잃어버린 나와 내 삶을 찾을 것 같고, 삶의 뿌리가 얽히고설키어 삶이 쉬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는 사람들의 희망 찾기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모여 떠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마을', '공동체’, ‘풀뿌리’라는 말을 들으면 미래가 아닌 옛날 어릴 적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물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마당에 있는 샘에서 길어오는, 하룻밤에도 몇 번씩 정전되는 것이 일상인, 아이스크림과 바나나는 TV에서나 보는 먹거리였던, 새 옷은 추석이나 설에 생기는 그 시절로 말이다. 어린 시절 추억의 사진 중에 가끔 꺼내보는 사진이 몇 장 있다. ‘만식이’, ‘꽃님이’, ‘이름을 모르는 키작은 아저씨’ 사진이다.

말발굽 소리 흉내 잘 내던 '만식이'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에 '만식이'라 불리는 친구가 있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도 시골 친구들에겐 여전히 만식이로 통한다. 그 당시 TV에서는 지금은 일제강점기 말 친일 행위가 논란이 되고 있는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드라마에서 조만식이 머리를 다쳐 붕대로 머리를 동여매고 나왔는데 우연히도 그때 그 친구가 머리를 다쳐 조만식과 똑같이 붕대로 머리를 동여매고 있어서 그 이후 우리 모두의 ‘만식’이가 되었다. 만식이는 만년 반 꼴등에, 5학년인데 구구단도 외우지 못하고 한글도 아직 떼지 못했다. 하지만 말발굽 소리 흉내를 잘 내 친구들이 "만식아~ 말발굽" 하면 활짝 웃으며 흉내를 내던 만식이, "만식아~~" 부르면 어디서든 웃으며 달려오던 만식이는 우리 모두의 친구였다. 만식이는 문명개화된 이 시대의 언어로는 ‘지적장애인’이다.

동네 꼬마들의 강적 '꽃님이'
항상 머리에 꽃을 꽂고 다녀 마을 사람들이 ‘꽃님이'라 불렀다. 동네 꼬마들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꽃님이는 미쳤대요~ 꽃님이는 미쳤대요~” 외치며 놀려대면 처음에는 그저 웃다가 어느 순간 휙 돌아서 쫒아온다. 아이들은 깜작 놀라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허둥지둥 도망쳤고, 어른들에게 혼꾸멍나게 야단맞는 풀죽은 꼬마들의 모습은 마을의 일상 중 하나였다. 꽃님이 가족이 있는지,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언제부터 마을에 살기 시작했는지 조차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봄이면 꽃피듯이 언제부터인가 마을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머리에 꽃을 꽂고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꼬마들과 실랑이하는 게 꽃님이의 일상이었다. 그렇게 무심히 함께 살았다. 대학생 때 시골에 갔다 눈이 내린 듯 하얀 머리에 꽃을 꽂은 할머니가 된 꽃님이를 본 게 마지막 모습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문득 궁금해 어머니에게 “꽃님이는 어떻게 살아요?” 물었더니 “이제 너무 늙어 군에서 어디로 보냈다더라” 하셨다. 지금으로 보면 노인요양원에 보낸 것이리라. 문득 '그 오랜 세월 동안 꽃님이는 어떻게 입고, 먹고 살았을까?'라는 물음이 생겼다. 그때까지 한 번도 그런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꽃님이는 이 시대의 언어로는 ‘정신장애인’이자 ‘수급자’이다.

온 마을 일을 다 하는 ‘키 작은 아저씨'
예전에 시골집은 대문을 열어놓고 살았지만 그런다고 아무나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수시로 집에 들어와 마당을 쓸고, 널어놓은 빨래를 걷고, 샘 주변을 청소하는 40대 중반의 키 작은 아저씨가 계셨다.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고 마을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을에서 어느 집이나 들어갈 수 있는 자유통행권을 소지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때때로 땔감나무 운반 등 여러 가지를 부탁했다. 마을 사람들은 부탁한 일이건 아니건 ‘키 작은 아저씨’에게 쌀, 반찬, 현금 등을 대가로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저씨 직업은 마을 관리인이었다. ‘키 작은 아저씨’는 ‘엄친아’가 각광을 받는 이 시대의 언어로는 ‘지적장애인’이자 ‘수급자’이다.

세 사람을 ‘장애인’, ‘수급자’로 불러서는 그 시절 추억이 회상되지 않는다. 지금도 그저 그들은 어릴 적 함께 살았던 마을 사람일 뿐이다. ‘만식이’, ‘꽃님이’, ‘키 작은 아저씨’를 지적장애인, 정신장애인, 수급자로 인식한 것은 법, 제도, 사람에 대한 지식이 쌓인 이후이다. 오히려 이런 류의 지식이 늘어갈수록 불편함도 쌓여간다. 토론회나 이러저러한 회의에서 장애인-비장애인, 장애인화장실, 수급자, 차상위계층 등의 단어가 입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불편하다. 사람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말과 지식이 사람을 위한 것일까? 구분하고 구별하는 이런 말들이 꼭 사람과 삶을 위해 필요한 걸까? 필요하다면 누구를 위한 필요일까? 해서 '장애인이라 불리우는 사람들, 수급자라 불리우는 사람들’이라고 나름대로 불편함을 피해가고 있다. 물질도 궁핍했고 사회와 사람에 대한 지식도 깊지 않아 ‘00장애인’, ‘수급자’ 등의 말이 없었던 어린 시절에 우리는 ‘만식이’, ‘꽃님이’, ‘키작은 아저씨’와 무심히 함께 살아갔다. 그들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얽히고설킨 많은 뿌리 중 소중한 하나였다. 언제까지 우리는 사람들 앞에 딱지를 붙여 불러야 할까...

2015년 10월 21일은 영화 <Back to the future>의 개봉 30년이 되는 날이란다. 얽히고설킨 넝쿨을 ‘인권나무’로 그렸던 중학생들의 통찰력과 만식이, 꽃님이, 키 작은 아저씨와 그냥 살았던 과거. 마을과 공동체, 풀뿌리를 강조하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려는 지금. 어쩌면 30년 전 개봉한 영화의 제목처럼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만식이와 꽃님이 그리고 키 작은 아저씨가 그저 함께 살았던 과거란 이름의 ‘오래된 미래’가 아닐까?

‘마을’, ‘공동체’, ‘풀뿌리’란 단어가 강조되지 않아도 무방했던 그때로...
덧붙임

동주 님은 광주인권운동센터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