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오름 > 웰컴투, 여덟살 구역

[웰컴투, 여덟살 구역] 책 읽기 싫어도 괜찮아, 우린 친구니까

강력한 라이벌

책언니는 책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려는 활동이다. 그런 우리에게 언제나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다. 그건 지금 만나고 있는 친구들이 1학년이던 첫해부터 시작됐다. 우리는 준비해간 책이 아닌, 다른 책을 읽어달라며 가져오는 수많은 그림책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에 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2학년이 되자 이번에는 스마트폰 게임이 나타났다. 스마트폰 쟁탈전이 매일매일 반복되어 어쩔 줄 모를 즈음, 다행히도 스르륵 사라져 갔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만화책이 부동의 1위로 책언니의 라이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말이지 그 무엇하나 만만하지 않았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며 같이 뛰어노는 것에 졌던 날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한 채 돌아오면서 우리끼리 한숨을 쉬었다. “그래. 노는 걸 어떻게 이겨. 그게 훨씬 재밌지….” 스마트폰을 숨기려고 애쓰고, 끝나고 주겠다고 협상을 할 때도 그랬다. “그래 당연히 게임이 훨씬 재밌겠지…. 나도 게임이 재밌는데….” 가장 인기 있던 만화책을 한 권 같이 보고 온 다른 책언니 엠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저거 진짜 재밌어…. 우리가 이길 수가 없어.”

언제나 우리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라이벌과 싸워야만 한다니 너무 힘들었다. 사실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책언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니다. 언제나 우리는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준비해가니 ‘안 읽어도 상관없어’가 될 수는 없다. 저토록 다른 것을 하고 싶어할 때, “아냐. 그래도 이걸 해야 해!” 하고 강제하는 어른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공부하자는 건 아니었지만, 생각하고 이야기하자던 건 맞았다. 세상에 속지 않기 위한 이야기를 하길 바랬다. 마냥 하자는 대로 놀 때도 있지만(그럼 우리도 정말 즐겁다!) 늘 그럴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하자고 강제할 수도 없었다. 으악! 이 모든 게 버무려지니 속은 혼란으로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책 읽기보다 하고 싶어하는 게 저만큼 많다고 해도 포기할 수는 없다. 관심 갈만한 이야기라면 책 읽기도 재밌어하니까. 재밌는 놀이 형태로 진행해서 관심을 끌어오는데 애를 쓰기도 했다. 이건 우리가 준비한 것도 해보고 싶어지게, 잘 보이려고 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아무리 준비를 해도 분위기가 폭주의 빛을 띌 때에는 별 소용이 없기도 하다. 때로는 만화책은 쉬는 시간에 보자거나, 이 안에서는 이야기만 하자고 가자마자 단호히 말하기도 한다. (요즘 분위기를 잡으려고 자주 썼던 방법이다.)
화를 내거나 혼내는 방식으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단호함을 가져가긴 했다는 것. 그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당장 우리의 이야기를 꺼내볼 기회라도 만들려면 어쩔 수 없다며 속으로 나를 위로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책 읽기 싫어!

얼마 전 학기를 마무리할 시점이 다가왔고, 한동안 듣지 못했던 그들의 생각을 좀 들어봐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오랫동안 만난 친구들이 해주는 책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3년간 만난 만큼, 이번에는 책언니들의 고민도 나눠보고 싶었다. 먼저 혼자 책을 보고 있는 친구 앞에 앉았다. 큰 기대는 없었다. 대답해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뭐. 하지만 진지하게 말을 거니 그 친구가 곧 책을 덮었다! 그리고 내 눈을 바라보며 나와 대화를 하려고 했다. 그 때 왠지 ‘아, 우리 관계가, 내가, 네가, 또 변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물었다.

“우리가 너희랑 뭘 하고 싶어서 오는 것 같아?”
“음…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하려고.”
속으로 헛웃음이 터졌다. 저 진심으로 가득 찬 눈빛을 어쩌면 좋아. 우리가 그렇게 보였다니 참 곤란했다. 이게 아닌데.
“우리가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하려고 너희랑 만나는 것 같아?”
“응.”
“우리가????? 왜?????”
“책을 많이 읽어야 생각도 많아지고, 아는 것도 많아지니까.”

책 읽기를 좋아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다운 올바른(?) 답변이었다. 어쨌든 이 부분만큼은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서둘러 이야기를 이어갔다. 책을 읽는 것보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좋다고 말을 했다. 책은 그저 우리가 같이 떠들 이야깃거리일 뿐이라고. 변명을 잔뜩 한 후에는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들에 관해서 하소연했다. 너희가 3학년이 된 만큼, 나도 처음엔 스무 살이었고 이제 스물두 살이 된 거잖아. 내가 다 잘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아는 어른이 아니잖아. 그렇게 투정을 부리니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같이 잘할 수 있게 도와줘…’ 하고 부탁을 하자 ‘그래!’ 하고 멋지게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대신 든든하게 내 눈을 바라봐줬다.
또 다른 친구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이게 뭐람. 2학기 때 또 하느냐며 한숨을 쉬었다. 왜 싫으냐 물으니 책 읽기 너무 싫다고 한다. 정말 책 읽기 싫어서 우리랑 그만 만나고 싶은 거면 어떡하지? 아니면 우리가 싫은 건가? 혹시 우리가 괴롭히고 있었던 건가? 무섭고 슬퍼졌다.

우리는 계속 만날 수 있을까?

그다음 주가 책언니의 1학기 마지막 날이었다. 끝나고 맛있는 것도 같이 먹으며 쫑파티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인지 다들 들어올 때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쫑파티를 위해 일찍 끝내려면 바로 시작하자고 하니 흔쾌히 모여든다. 다들 모여 앉았을 때, 책언니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다.
우선 지난주에 두 친구와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혹시 너희도 우리가 책 읽으라고 오는 것 같아?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말을 했던 친구가 나 대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라고 하는 게 아니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런 거라며 내가 했던 이야기를 모두에게 들려준다. 책언니를 계속하고 싶은지에 대해 물으며 2학기에 또 하느냐고 싫어했던 친구를 쳐다봤다. “저번 주엔 심술부린 거지?” 하니 씩 웃는다.(그럴 줄 알았지만, 다행이다!) 다들 책언니를 또 하자며 소리를 질렀다. 한 친구는 우리가 “자. 오늘이 마지막이잖아?”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화를 내기까지 했다! 2학기에 또 하는 거 다 아는데 왜 거짓말하느냐고. 애초에 우리 말은 1학기 마지막이라는 뜻이었지만 불안하게 만들었나 미안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책언니를 하며 종종 찾아오곤 하는 그런 따뜻한 순간이었다. 책언니이기 때문에만 겪을 수 있는 그런 순간. 다들 ‘그동안 투닥거리고 싫은 소리도 하고 싸우기도 했지만, 너희를 싫어한 건 아니었어.’ 하고 우리의 마음을 달래준다. 어쩐지 그 모습에서 의리 같은 게 느껴졌다. 오래오래 천천히 만나온 만큼, 뭔가가 우리 사이에 조금씩 쌓여왔구나.

종종 사람들이 내게 말한다. 왜 당신은 여덟 살인 그들을 쉽게 친구라고 칭하냐고. 흔히 나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하대를 하는 건 아니냐는 의심이다. 그때마다 약간 억울한 기분에 휩싸여 변명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진짜 친구인데.’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서로 친구라고 말해도, 어린 사람들도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공평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의혹에 찬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어, 어, 아닌데… 여덟 살들이 나보고 예전에 너넨 선생 아니고 친구잖아! 그랬는데….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려 길게도 말해보지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같다. 오히려 여덟 살과 스무 살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치고받고 싸워도 서로를 감싸주는 순간순간이 있어서 나는 믿는다. 우린 친구 맞아. 그냥 나이가 조금 많고, 조금 적은 친구인 것뿐인걸. 조금 더 말이 길고, 조금 더 말이 짧은 친구인 것뿐인걸. 그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서 서로가 점점 더 좋아지고, 의지하게 되어가고 있잖아.

가끔 혼자 상상해본다. 여덟 살이었던 이 친구들이 열 살이 되어버린 것처럼 언젠가는 우리의 관계가 또 달라지겠지? 변성기가 오고, 훌쩍 키가 자라난 모습. 약속을 잡고, 바깥에서 만날 수 있게 되겠지. 학교에서, 집에서 있었던 나쁜 일을 같이 욕하며 몰래 맥주 한잔 하는 모습. 서로의 연애를 이야기하며 낄낄대는 모습. 또 언젠가는 너희가 나에게 술 한잔 사주는 상상 같은 것들.(앗, 너무 술만 있나?) 뭐야, 너희가 술을 사줄 수 있다는 건 내가 삼십 대라는 거잖아? 혼자 낄낄거리다 문득 마음이 찡해진다. 정말 그때까지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은 책 읽으라는 이상한 사람들같이 느껴져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껏 달라져온 만큼, 우리는 또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그 무엇이라도 천천히 이야기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래오래 만나가며 내가 모두에게 덜 잘못하게 되면 좋겠다. 미움받지 않게, 사랑받을 수 있게, 그래서 우리가 서로의 힘이 될 수 있게.
덧붙임

쩡열 님은 '교육공동체 나다'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