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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투, 여덟살 구역] 교육은 사회화의 의무가 있는 거에요

우리가 종종 까먹는 것들이 있다. 같이 일하는 3, 40대의 동료들과도 ‘(장난삼아) 야, 너, 바보야’ 등의 친근한 호칭을 오가며 거리낄 것 없이 지내는 게 일상이다 보니 세간의 시선을 미처 신경 쓰지 못할 때가 많다. 함께 탄 버스나 지하철에서 평소처럼 대화하는 우리를 보고, 힐끔힐끔 ‘쟤들은 대체 무슨 관계인가?’하고 이상스럽게 보는 눈초리들을 어느 순간부턴가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책언니에서 우리가 취하는 태도나 방식은 기존의 교육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퍽 낯설 것이다. 일단은 선생님의 위치에서 자꾸 비켜나려 해서 애들의 행동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가 어렵다. 그런 탓에 오늘치 준비한 수업을 진행하고 말고의 문제에서 최종적으로 칼자루를 쥔 건 애들 쪽이다. 학교에서 종일 시험을 치고 왔다든지, 실컷 혼이 나고 왔다든지 하는 이유로 도저히 기분이 안 내킬 때 끝까지 하지 않겠다고 도리질 치는(다른 방으로 가서 아예 문을 잠가 버리는!) 이 사람들을 우리는 거스를 수 없다. 싫다는 수업을 억지로 시킬 명분도, 능력도, 의지도 없다. 어린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른이 기존의 위계질서에 기대지 않는다면 뭘 할 수 있을까. 교사에게서 선생으로서의 권위와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식적인 권한들을 걷어 내고 나면 뭐가 남을까. 우리가 그랬듯, 자신이 어린 사람의 관심과 흥미와 집중을 얻어내는 데 있어서 얼마나 무능력한지 처절히 깨달을 수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교육은 사회화의 의무가 있는 거에요

우리의 무능력함을 매주 실감했던 작년 봄 즈음. [웰컴투, 여덟살 구역]의 ‘최강의 그룹이 나타났다!’ 편에서 언급했던 아동센터 친구들을 만나던 무렵의 일이다. 수업을 시작한 지 한, 두 달쯤 지나서였을까. 한 번은 책언니로 인해 이 센터에서 회의가 소집된 적이 있다. 책언니 수업이 아이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조기 조영되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고는 이대로 둘 수 없다고 판단이 되었는지 긴급회의를 요청했다. 우리는 그동안 책언니를 하면서 겪었던 것들에 비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 친구들의 신뢰를 얻는 데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학교 끝나자마자 새로운 수업을 해야 하는 상황에 다들 반감이 있는 상태에서 더 필요한 건 자리에 억지로 묶어두는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일 같다. 해야 할 것들을 강제하는 관계로 만나고 싶지 않다. 이 사람들이 마음을 열 때까지 저희도 기다리는 중이니, 같이 기다려 주면 좋겠다. 크게 이 정도의 이야기였다. 선선히 수긍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기는 그렇게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냥 애들 원하는 대로만 해줄 수는 없다. 우리가 해줘야 할 게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반박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 당시 우리가 센터에서 만난 애들은 심리치유가 필요한 그룹으로 묶여 있었고, 센터에서든 학교에서든 지내는 게 원만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때 어떤 분이 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학교에서도 너무 산만하게 날뛴다든지, 참여를 잘 하지 않는다든지 말썽이 있는 애들이다, 규칙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런 면들을 여기에서라도 잘 조정해줘야 하는 거 아니겠느냐. 교육은 사회화의 의무가 있는 것이다. 당시 그 회의 자리 자체는 책언니들의 의견대로 좀 더 시간을 갖고 지켜보는 것으로 무난하게 마무리가 됐다. 근데 그 때 들었던 ‘사회화’란 말이 그 이후로도 내내 어지럽게 마음 한켠에 머물렀다. 그 사람이 했던 말에 동의해서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학교의 규칙 자체가 누구의 관점과 편의에 따라 만들어졌나를 따져봤을 때, 학교가 학생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그리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학생이 규칙을 잘 지켜야지.’같은 말에 반박할 대응논리 같은 거야 얼마든지 있다. 다만 다른 면에서 좀 걸리는 게 있다.

우리가 얼마나 다르든 나머지 세상은 여전할텐데

사회화 [명사]
1. 인간의 상호 작용 과정.
2. 인간이 사회의 한 성원으로 생활하도록 기성세대에 동화함. 또는 그런 일.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그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맞는 인간이 되어간다. 우리가 만나는 여덟살, 아홉 살 사람들은 매일매일 학교에 다닌다. 그 애들은 만만하고 친구 같은 책언니들을 좋아하는 동시에 너무 무섭지만 가끔 재밌는 놀이를 시켜주는 담임선생님을 좋아한다. 우리에게는 반말하고 막 대하지만, 당장 내 가족인 손위 언니나 형들에게는 책언니들한테 하는 것처럼 할 수 없다. 그렇게 까불대고 맞먹고 기어올랐다가는 형한테 맞을 테니까. 언니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여덟살들은 우리와 친구 같은 사이가 되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자연스럽게 상하관계에 적응하고 있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책언니에서 어떤 낯선 방식으로 얼마나 새로운 관계로 만나든, 학교는, 집은, 언니 오빠는, 담임 선생님은, 사회는, 세상은 여전하다. 여전히 철저히 위계적이고, 경쟁적이고, 가장 강력한 것은 힘의 논리다. 이들이 사회의 한 성원으로써 생활하기 위해 동화해야 할 기성세대의 질서란 이런 질서다. 책언니를 하는 동안에는 적어도 학교처럼 이런저런 규칙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장난으로라도 너무 아프게는 때리지 말기 등 서로 지켜줘야 할 것들을 인위적인 강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규칙이 없다고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센터에서 우리가 있었던 ‘방 안’은 다른 규칙에서 벗어난 작은 해방구였을까, 그저 두 시간(수업시간)의 짧은 도피처였을까. ‘사회화’라는 거대하고 현실적인 단어 앞에서 책언니는 너무 좁고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화가 덜 되면 뭐 어때

세상은 어차피 그렇고 그런 거야. 어쩔 수 없어. 현실에 맞춰서 적당히 순응하고 사는 편(사실상 사회화란 건 이거 아닌가)이 앞으로의 학교에서 사회에서 살아남는 데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 그딴 패배주의에 쩐 생각을 맘 약해질 때면 잠깐잠깐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는 못 살았고, 앞으로 못 살겠는데, 우리가 만나는 애들한테만 참으라고, 참고 견디고 살라고 하라고? 그렇게는 못 하겠다. 아무래도 난 아직 (특정 방식의) 사회화가 덜 된 모양이다. 학교에서의 규칙은 그 내용이 정당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지배적인 질서이기 때문에 정당성을 얻는다. 우리가 하는 일은 적어도 그 뒤바뀐 선후를 밝히는 것이고, 애들을 사회화시켜야 한다면서 기존의 질서를 정당화하려는 논리에 맞서는 것이다. 사회, 현실. 그런 추상적이고 커다란 것들은 언제나 지금의 작은 움직임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지금의 구체적인 현재를 서로가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힘이다. 할 수 있는 걸 하자. 그런 의미에서 (말 잘 듣는 아이 되기 식의) 사회화라는 커다란 흐름에 맞서는 반항적인(!) 두 시간을 앞으로도 꿋꿋이 만들어가야겠다.
덧붙임

엠건 님은 '교육공동체 나다' 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