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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기억을 공유하는 힘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싶습니다.

-강기훈님에게 보내는 편지-

편집인 주

<편집인 주>

세상에 너무나 크고 작은 일들이 넘쳐나지요. 그 일들을 보며 우리가 벼려야 할 인권의 가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질서와 관계는 무엇인지 생각하는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넘쳐나는 '인권' 속에서 진짜 인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나누기 위해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하나의 주제에 대해 매주 논의하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인권감수성을 건드리는 소박한 글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때로는 촉촉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가가기를 기대합니다

"지금 돌아보자면 어떤 순간이었다기보다는 세월 그 자체였다는 생각입니다. 고통은 그냥 고통스러운 것일 뿐이지 그 고통에 어떤 단계가 있는 건 아닌 것 같고요. 그저 수많은 시간 동안 겪어왔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오늘 생각이 나더라고요"

[사진설명] 2005년 3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에서 심경을 밝히고 있는 강기훈씨 [출처: 천주교인권위원회]

▲ [사진설명] 2005년 3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에서 심경을 밝히고 있는 강기훈씨 [출처: 천주교인권위원회]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요? 오랜 시간 강기훈님의 곁에 있던 사람, 힘을 보탰던 사람도, 23년의 시간동안 죽은 자의 몫까지 살아야 했던 몫을 알 수 있을까요? “사과 한마디”조차 않는 그들이 버젓이 TV에 나오는 모습, 권력의 요직에 차례차례 올라서는 모습을 봐야 했던 강기훈님의 모습을 그려보지만, 그 시간과 기억을 함께 하지 못한 저에겐 ‘많이 힘들고 괴로웠겠다’ 짐작 이상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1991년 봄 강경대열사의 죽음 이후, 이 땅에 변혁을 꿈꾸던 사람들은 슬픔과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거리로 쏟아져 나올 때 강기훈님 또한 그곳에 계셨겠지요. 그리고 검찰과 언론이 분신배후설을 조작하고, 강기훈님이 유서를 대필했다고 주장할 때, 이 싸움이 23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23년의 시간은 어떤 기억일까요? 80년 광주민중항쟁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살고 있는 사람들, 5월 18일이 되면 그날을 떠올리면 상처받은 마음을 헤아려야 했던 사람들에게 민중항쟁의 유가족, 민주화운동가로 인정받았다고 하여 모든 상처가 치유되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수정권이 집권하면 어김없이 다시 꺼내어지고, 왜곡되어 공격받는 한 그들의 상처가 과거의 것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강기훈님에게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재심을 통해 조작된 사건이 판명되었음에도, 사과는 커녕 상고를 결정한 검찰과 여전히 권력의 요직에 버티고 있는 사건 관계자들, 그리고 강기훈님이 겪었던 일들이 반복되는 사회를 보며, 다시 그 상처는 헤집어 지리라 생각됩니다. “ 이 재판은 실체적 사실과 진실을 규명하는 것보다는 사실은 과거 잘못된 사법부의 판결을 바로잡는다는 의미가 더 큰 거거든요.”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권력자들이 무엇을 덮으려 했고,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밝혀지지 않는 한, 그때의 기억과 감정들은 여전히 존재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들이 덮으려 한 진실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의 꿈과 힘이지 않을까요. 3당 야합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한 노태우정권에게 91년도 거리로 나온 변혁의 힘은 두려움이었겠지요. 그리고 사람들의 꿈과 힘이 거대한 힘을 발휘하는 순간, 자신들의 권력을 지킬 수 없다는 걸 알았겠지요. 증거가 조작되었다는 실체적 사실을 넘어, 진실은 결국 권력을 지키기 위해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을 왜곡해 권력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유지했다는 점이지 않을까요? 국가권력이 모든 힘을 쏟아 사실을 왜곡하고, 권력을 유지한 모습, 우리가 규명해야할 남은 진실의 몫은 그것이라 생각됩니다.

강기훈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 다른 사람들이 보입니다. 체제의 진실을 감추려는 힘에 마주친 사람들입니다. 내란음모의 광풍에 동료를 잃고, 사회에서 내몰려 감옥에 있는 사람들.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그들의 가족들. 왜곡된 증거에 의해 간첩으로 내몰려 8개월간 독방에서 버텨야 한 유우성씨. 그리고 권력과 자본에 의해 내몰려진 사람들에게서 강기훈님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사진설명] 소위 '내란음모 사건' 피해자 인권침해 보고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발언하고 있다.

▲ [사진설명] 소위 '내란음모 사건' 피해자 인권침해 보고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발언하고 있다.


그들의 모습이 강기훈님과 겹쳐지는 건 진실을 왜곡하고 감추려는 힘이 동일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끝도 없는 불면, 여러 사람을 저주하며 보내야 했던 시간,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텨야 했던 그 감정 때문입니다. 왜곡된 진실과 사실을 감추려는 힘을 마주치며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떠올랐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곳에서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왜곡되고 지워집니다. 저들의 강고한 힘을 내 힘으로 견뎌낼 수 있을까 부터 왜 나는 이러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 걸까 자책하기도 합니다. 나는 왜 싸우는지, 나와 함께 싸우는 이들이 야속할 수도 있습니다. 수만 가지 감정들이 교차한 채 살아갑니다. 지금 이곳에서 진실을 향해 싸워가는 사람들 모두가 비슷하리라 생각됩니다.

이들 한명 한명이 연결된 그림이 떠오릅니다. 희미한 끈으로 연결되기도 하고, 뚜렷한 색깔의 끈들도 보입니다. 아마 끈들은 그때의 감정과 기억이겠지요? 어떤 이야기도 들어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 억울한 마음, 두려움과 미움, 혼자서 버텨내기 힘들었던 시간을 자신의 곁에서 함께 싸워주던 사람들을 보며 버텨냈던 마음까지. 그리고 또한 많은 기억이 남겨져 있습니다. 91년도 소중한 목숨을 내려놓았던 사람들, 그들의 모습을 보며 괴로움과 분노에 거리로 나가던 사람들. 잊히는 진실을 찾고 삶과 죽음의 명예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 권력의 힘을 마주쳤던 순간들, 간첩으로 몰리고, 감옥으로 들어가던 순간들. 기억과 감정이 엉켜진 그림에 놓인 사람들은 사건의 당사자만 아닙니다. 왜곡된 사실에서 진실을 지키려 함께 싸우는 사람들,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연대하는 사람들도 그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연루된 사람과 당사자들은 서로의 끈을 붙잡고 서 있습니다.

그림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습니다. 예쁜 이름을 붙여주고 싶지만, 딱히 떠오르진 않습니다. 그냥 ‘기억을 공유하는 힘’이라고 붙여봅니다. 이곳의 기억은 과거의 기억이 아닙니다. 과거에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작동한 국가의 힘은 현재의 기억이기도 합니다. ‘내란음모’사건을 만드는 힘, 간첩조작 사건을 만드는 힘,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을 억누르는 힘은 현재에도 계속 됩니다. 그 과정에서 국가권력은 조작과 선동을 일삼습니다.

‘기억을 공유하는 힘’은 권력이 조작하는 기억을 재조직 하는 힘입니다. 강기훈님의 사건이 계속된 투쟁을 통해 조작된 기억을 새롭게 사회적 기억으로 바꾼 것처럼, 이 힘을 통해 우리는 그 사건의 당사자만이 아닌 모두가 연루된 사회적 기억을 만들어야 합니다. 위기에 몰릴 때마다 등장하는 시국사건, 연대를 파괴하기 위해 물리력을 동원하는 국가권력을 당사자 개인의 기억이 아닌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 때 우리의 투쟁은 새롭게 조직될 수 있습니다.

2014년의 기억들을 그림 속에 그려 넣어 봅니다. 잊지 말아야할 기억들과 감정들을 통해 싸워야할 진실과 우리의 힘을 지탱할 감각을 찾으려 합니다. ‘내란음모’ 사건,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강기훈님의 사건에 저는 어떻게 연루되어 있고,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 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저만의 몫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의 몫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꿈꿔봅니다. 우리가 만드는 새로운 ‘사회적 기억’이 세상을 변화시킬 거대한 힘이 되길.
덧붙임

훈창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