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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록의 인권이야기] 내가 버럭한 이유

몇 년 전에 내가 살던 지역에서 남미의 진보운동에 대한 이야기마당이 열려 참석했었다. 찻집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즐거운 자리는 뒤풀이 술자리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강연자로 섭외된 분이 남미에 오래 있다가 한국에 들어오니, 정부와 지자체의 공격적인 금연정책이 못마땅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담배 연기에 민감한 편이다. 길을 걷다가도 앞선 사람이 담배를 피우면서 걸으면 얼른 뛰어서 추월한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는 솔직히 좋은 면이 많다는 이야기로 댓거리가 시작된 논쟁이 다음날 새벽 햇살이 비출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길어진 이유는 내가 흡연자와 비흡연자의 관계에서 흡연자들이 보이는 태도를 성폭력 가해자의 태도에 비유하면서다. 그 비유에 상대방은 감정적으로 폭발했고, 이야기는 공전됐다. 바로 얼마 전에 이와 비슷하게 내가 버럭 화를 냈다. 인권감수성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다. 솔직히 인권운동사랑방에 없었다면 그렇게 버럭 했을까 싶다. 그래도 명색이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인데, 인권감수성이 없다는 말을 들으니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아무튼 두 경우 모두 ‘성폭력 가해자’라는 비유와 ‘인권감수성이 없다’는 규정이 감정을 툭 건드렸다. 그런 말을 해보기도 하고 들어보기도 하니, 뭔가 보이는 게 있다. 비흡연자를 생각하지 않는 흡연자의 태도는 분명 성폭력 가해자의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나도 어느 특정한 지점에서는 인권감수성이 없다.(설마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믿는다) 그런데 그런 인식 또는 사실부터 무턱대고 말하는 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굴복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설득을 하고 변화를 추동하려고 한다면 말이다.

그런 규정 또는 꼬리표 붙이기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다. 화를 내며 강력히 부인하거나, 아예 숨어버리는 것이다. 설득과 변화를 추동하려고 하는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자신의 태도와 입장을 숨기고 아예 숨어버리는 게 더 큰 문제다. 화를 내면 싸울 수라도 있다. 운동사회 공동체 내 반성폭력 운동에서 많은 남성들 역시 꼭꼭 숨어버린 게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런 것 같다. 반성폭력 내규는 나에게 도덕규범이나 법률에 더 가깝다. 별생각 없이 준수하려고 하지만, 나와 밀착되어 끊임없이 나를 되돌아보게 하거나, 변화의 계기가 되진 않는다. 혹여 실수하지나 않을까 하는 눈치를 보게 한다. 나꼼수의 비키니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성적 대상화’라는 걸 어떻게 봐야 할지, 일정한 대상화를 수반하지 않는 섹슈얼리티는 어떤 것인지 등등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꽤 있었지만 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운동사회에서 논쟁이 생산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드문 이유 중 하나가 이런 꼬리표 붙이기 때문이 아닐까? ‘~주의자’라는 명명으로 상대방을 규정한 다음, 그 규정에 따른 비판을 연역적으로 나열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비판한다. 그랬을 때, 비판의 성패는 얼마나 세련되게 상대방을 ‘~주의자’에 맞춰서 설명해내느냐가 된다. 상대방에 대한 판단은 이미 ‘~주의자’라는 규정에서 내려져 있다. 그런 말을 들은 상대방은 정당한 비판, 사실조차도 ‘~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부인하려고 애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념’은 분명 필요하다. ‘사회주의’, ‘여성주의’, ‘성폭력’, ‘나이주의’, ‘개량주의’, ‘인권감수성’,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성애주의’와 같은 개념들은 이 복잡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창을 열어준다. 이런 개념과 이념에 따라 운동이 조직되고 결속될 수 있는 지반이 형성되고 맞서 싸워야 하는 대상 역시 분명해진다. 반성폭력 내규가 나에게 실수하지 않을까 하는 눈치 보기를 강제한 것도 분명 중요한 성과다. 성폭력 개념의 확립, 성별권력관계의 드러냄, 내규를 통한 강제력과 같은 게 목표였을 때, 반성폭력 내규 제정 운동은 자기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것이다. 교양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극심한 이념 대립을 지양하고 협력과 공생의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전투적 노동조합운동 이런 거 지양하고 입장을 바꿔서 사측의 처지도 고려해서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자고 한다. 그런데 내가 볼 때 그건 자본가 계급이 사라지고, 사회적 생산을 어떻게 조직할지, 회사, 공장 단위의 노동이 어떻게 분배되어야 할지 그런 고민을 해야 하는 사회에서나 통할 이야기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꼬리표 붙이기의 폐해는 운동이 굴복시켜야 하는 대상과 문턱을 넘어선 이후, 설득하고 변화를 추동해 운동의 지지자 또는 동료가 되고자 하는 관계에서 다시금 돌아볼 문제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너를 비난하거나 부정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잘났다는 걸 증명하려는 게 아니라, 네가 변했으면 좋겠고, 함께 변화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는 진심’이 샘솟는 관계에서 말이다.
덧붙임

정록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