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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냥의 인권이야기] 내 사랑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 교사. 2월 하순이 되면 나는 30여 명의 이름의 적힌 종이를 하나 건네받는다. 그해에 담임하게 될 학생들의 명단이다. 그리고 나는 요구받는다. 얼굴도 보지 못한 그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그 순간부터 사랑으로 사랑으로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기를. 하지만 난 그게 늘 싫었다. 불가능한 일이다.

# 여성. 길을 가다가 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이 내 다리를 부여잡으며 넘어졌다. 나는 요구받는다. 사랑을 담뿍 담은 얼굴로 인자한 미소를 띤 얼굴로 그 사람을 일으키고는 옷을 털어주며 괜찮나 물어봐 주기를. 하지만 난 그게 싫다. 난데없이 왜 내 다리를 부여잡아? 난 사과 받아야 할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늘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진심으로 생각했다. 난 ‘어린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성향 상 맞지도 않다. 특히나 나는 학생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할 생각도 없다. 덧붙여 의사는 교육 기간 중 끊임없이 환자와 감정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경계하도록 훈련받는데 왜 교사는 정반대로 끊임없이 사랑하라고 세뇌받는가에 대해 나는 문제제기하곤 했다. 의사가 감정에 빠지면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볼 수 없듯이 교사도 그렇다. “내 자녀의 공부는 내가 못 봐준다.”는 말을 보호자들이 흔히 하는 것은 감정이 관여되었을 때 교육 활동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말이다. “근데 왜 자꾸 선생보고는 사랑하라고 그래!” 하며 화를 내곤 했었다.

“선생님, 저 손에서 피 나요.”하는 학생에게 나는 “그래서요?”라고 답한다. 그런 나를 학생은 당황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웃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난 정말 그 사람이 내게 뭘 원하는지 몰라서 “그래서요?”라고 묻는 것뿐.

그렇게 10년간 선생을 해왔다. 그런데 어제 조금 다른 것을 깨달았다. 요즘 전국의 초등학교가 몸살을 앓고 있는 학예회 연습 중이었는데, 무대 위에 올라간 학생들 말고 순서를 기다리는 다른 학생들은 무대 아래에 앉아 각자 그냥 잉여로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근데 우리 반 학생들이 맨 앞줄로 가더니 무대 위 학생들이 하는 합주에 맞춰 양손을 머리 위로 뻗고 흔들기 시작했다. 무슨 콘서트에 온 것처럼. 그게 재미있기도 하고 훈훈하기도 해서 키득키득 혼자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중에 뭘 하든 저 사람들은 잘살 거야.’

그 말이 머리에 스친 순간 깨달았다. 내가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학생들이 다칠까봐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학생들의 시험 점수에도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이 일기를 쓰는지 독서를 하는지 숙제를 해오는지도 잘 모른다. 알아서 하겠지(내지는 알아서 해야지)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학생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그건 ‘사랑’을 오해한 것이었다. 학생들이 다칠까봐 걱정하고 일기 안 쓸까봐, 시험점수가 떨어질까봐 염려하고 엇나갈까봐 불안해하고……. 무의식중에 나는 그런 불안과 염려가 사랑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사랑 없는 교사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대체로 학생에게 무심한 선생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고객만족센터에서 말하는 “사랑합니다. 고객님.”과 같은, 만나자마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그리고 상대방과의 어떤 관계도 합의도 없는 무작정 사랑은 오히려 서로에게 반인권적이고 비인간적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면 그 사랑과 불안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랑은 ‘소망’보다 ‘믿음’에 가까우니까.
덧붙임

진냥 님은 "교사로 밥을 벌어먹은지 십년차. 청소년들의 은혜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