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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류의 인권이야기] 멈칫, 화살을 돌려주세요

“아, 이거 억울해서 직장을 상대로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해야겠어요.”
흔하지 않은 용기니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연대해야겠지만 내용을 듣고 보면 마음이 멈칫한다. 상담내용은 이렇다. 직장에서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건강검진에서 HIV 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 양성판정이 나왔다. 그런데 두 번째 검사를 받았더니 음성이라는 것이다. 양성판정을 받은 이후 음성확인을 할 때까지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뭘 잘못했나... 왜 내가 에이즈에 걸린 거지?...” 하는 생각으로 잠을 제대로 이뤄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잘못된’ 양성판정을 내린 검진기관과 검진결과를 그대로 알린 직장을 상대로 소송을 하겠다는 것이다.

직장건강검진을 통해 피검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HIV 검사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 직장건강검진을 통해 피검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HIV 검사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양성판정에도 지위가 있다?

그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 HIV/AIDS 감염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검사결과가 양성으로 나왔을 때 자책감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에이즈에 대한 낙인-성적으로 문란하고 스스로 큰 잘못을 한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고 더 이상 사회생활도 하지 못하고 주위에서 버림받는 병-을 스스로에게 덧씌우는 과정인 것이다. 지난 9월 열린 감염인 인권증언 <말할 게 있 수다>에서 증언에 나선 한 감염인은 양성판정을 받은 이후 쓰러질 때까지 술을 마시며 죽음을 기다렸다고 말하기도 했다. “술값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술을 마시고 거의 빠지는 날 없이 술만 마시면서 살아”갔다는 그는 “죽고 나서도 주위 사람에게 병명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 걱정하며 지냈다. 그가 다시 기운을 차리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오랜 시간 건강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자신을 보니 이 병이 바로 죽는 병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때다.

그러니 음성인데도 양성판정을 받았을 때의 정신적 충격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만도 하다. 하지만 마음이 멈칫하는 것은 그가 자신에게 덧씌운 낙인이 고스란히 HIV/AIDS 감염인들에게 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감히 나를 에이즈 환자로 몰아붙이다니’ 하는 분노 앞에서 ‘양성이므로’ 양성판정을 받은 HIV/AIDS 감염인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HIV/AIDS 감염인 인권증언에 나선 감염인들

▲ HIV/AIDS 감염인 인권증언에 나선 감염인들




HIV 검사는 위양성(**)이 나올 수 있는 검사라 보통 두 번의 검사를 거친 후 확진을 위한 또다른 검사를 받고서야 감염여부를 판정한다. 그러니 검사에서 양성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의학의 한계이기도 하다. 문제는 위양성이 나올 수도 있는 검사 자체가 아니라 HIV/AIDS 감염인에게 부당하게 덧씌워진 낙인이고 검사를 한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고 건강검진항목으로 밀어넣은 직장과 검진기관이며 검사전후의 상담도 전혀 없는 제도의 허점인 것이다.

‘제대로’ 에이즈 예방하자

지난 7월 인권침해적인 에이즈예방법을 바꾸기 위해 감염인단체와 인권·사회단체들이 꾸린 ‘에이즈예방법대응공동행동’은 “감염인 인권증진이 에이즈예방”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14일 민주노동당 현애자의원 외 19명이 발의한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예방 및 감염인 인권증진에 관한 법률(아래 감염인인권증진법)’도 그 결실 중 하나다. 여전히 통제와 감시의 패러다임에 갇혀있는 보건복지부의 에이즈예방법과 감염인인권증진법의 차이는 여러 면에서 드러나는데 위 상담내용과 관련된 검사부분만 보더라도 두드러진다.

감염인인권증진법은 피검사자의 의지에 반하는 강제검진을 금지하며 사업주가 HIV 검사 결과를 노동자에게 요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또한 검사를 받을 때 익명검사가 가능하다는 점을 알려줘야 하며 검사 전후에 상담을 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더불어, 검사결과는 본인에게만 통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검사 이후 이루어지는 신고와 보고에서 실명을 비롯한 개인신상정보가 포함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감염인 인권증진이 에이즈예방”임을 말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 감염인과 활동가들

▲ “감염인 인권증진이 에이즈예방”임을 말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 감염인과 활동가들



HIV/AIDS는 국제사회에서도 중요한 의제인 만큼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일찍부터 HIV/AIDS와 관련된 인권문제를 강조해왔다. 당사국 정부가 건강권을 존중, 보호, 실현할 의무를 설명하고 있는 일반논평 14에서도 HIV/AIDS와 관련된 내용이 두드러진다. 2003년에 발표된 건강권에 대한 특별보고관 보고서는 건강권의 주요 의제로 빈곤과 더불어 차별, 낙인에 집중한다. 보고서는 특정계층에 대한 차별과 소외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이 질병의 분포와 건강결과에 영향을 미치며 특정한 건강상태와 관련된 차별과 낙인이 사회불평등을 강화한다고 말한다. 특히, HIV/AIDS 감염인들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HIV/AIDS의 확산과 영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며 우려하고 있다. 이를테면, HIV/AIDS 감염인으로 밝혀지는 데 대한 두려움이 감염인들로 하여금 질병의 예방, 관리 및 치료 노력에 중요한 자발적인 상담이나 검사를 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HIV 양성(positive), 인권도 양성이어야(Positive Rights!)

국제인권문서들이 HIV/AIDS 정책에 대한 친절한 안내를 꾸준히 제공하는 데도 한국의 에이즈예방법은 변할 줄 몰랐다. 2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인권에 눈 돌리지 못한 정부의 태도는 감염인 차별의 뿌리깊은 역사를 만들어왔고 시대착오적인 에이즈정책을 유지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려왔다.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할 곳은 따로 있다. 직장의 무분별한 검진, 검진결과를 사업주에게 통보하는 검진기관, 그 모든 제도들을 온존시키고 인권실현을 위해 아무런 조치를 시행하지 않은 정부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자. 음성과 양성이라는 검사 결과가 인권침해가 불가능하거나 가능한 기준선이 되어서는 안된다.

(*) 우리가 보통 ‘에이즈(AIDS)’라고 부르는 것은 '후천성면역결핍증'이라는 질병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에이즈의 원인은 인간의 면역계(감기에 걸리거나 몸에 세균이 들어오거나 할 때 저항할 수 있도록 작동하는 구조)를 파괴하는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의 감염이다. HIV에 감염되면 보통 10년 이상의 잠복기를 거치게 되는데 이때는 건강상의 문제가 별로 나타나지 않다가 바이러스가 증식해서 면역계를 파괴하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잘 나타나지 않는 병들을 앓게 된다. 쉽게 말하면, 독특한 폐렴, 독특한 위염, 독특한 망막염 등을 앓게 되는데 이 단계를 에이즈라고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HIV 감염이 바로 에이즈인 것처럼 오해하기도 해서 전세계적으로 HIV에 감염된 사람들과 에이즈환자들을 통칭해 PLWHA(people living with HIV/AIDS)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적당한 번역어가 없어 'HIV/AIDS 감염인'이라고 부른다.

(**) HIV 검사결과 양성(positive)이라는 것은, 혈액 안에 HIV에 대한 항체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검사가 그렇듯 100% 정확한 결과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HIV 검사의 경우 위양성이 적지 않다. 즉, 혈액 안에 HIV항체가 없는데도 양성결과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