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오름 > 내 삶의 불복종

“스타벅스를 보면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생각나요”

[기획 연재 - 내 삶의 불복종 ①] 나는 스타벅스에 가지 않는다

<편집인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생김새만큼이나 참 다양하다.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어떤 것을 거부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가령,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도 있고,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개인정보의 누출 우려 때문에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 사람, 이마트에 가지 않는 사람, 자가용 차를 타지 않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정치적 이유로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무언가를 거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기획 연재 - 내 삶의 불복종]에서는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듯, 무언가를 거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역시 자신의 삶의 방식을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소통의 힘을 믿는다. 자신의 문제의식을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자신의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또 그런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운동’이 될 것이다. 그런 운동은 삶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부조리한 사회의 문제들도 바꿔나갈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자, 당신에게 강요하는 대신 자신의 삶의 방식을 그저 묵묵히 실천하며 나지막히 읊조리고 있는 우리 옆의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하루는 사람들과 명동에서 캠페인을 열기로 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스타벅스 커피매장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날 우리는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만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유는 서로 다른 스타벅스 매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명동에만 스타벅스가 세 곳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심 속에서 스타벅스는 공공기관만큼이나 주요한 위치에서 흔히 눈에 띄곤 한다. 커피가격이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리만치 매장 안은 늘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으며, 그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음료를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여유롭게 책을 읽는 모습들은 밖을 지나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련되면서도 편안한 ‘휴식의 공간’으로 들어가고픈 유혹에 빠져들도록 한다.

나 역시 그 곳을 자주 드나들었던 적이 있다. 진한 커피가 기호에 맞기도 했고 지인들과 만나는 장소로도 적당했기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유난히 커피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스타벅스 커피나 가게 안에 진열된 제품들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그런 경험 탓에 스타벅스는 어느덧 한국사회에서 대표적인 커피 브랜드로 성장했고 사람들의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스타벅스와 시오니즘

스타벅스 보이콧<출처; georeport.co.kr>

▲ 스타벅스 보이콧<출처; georeport.co.kr>

하지만 이제 나는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물론 사람들을 만나는 약속장소로도 그 곳을 잡지 않는다. 일종의 보이콧을 선언한 셈이다. 그렇다고 나의 스타벅스 보이콧은 마치 담배를 끊는 행위처럼 지나치게 의식적이거나 단계적이지는 않았다. 매우 자연스럽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언제부터 발길을 끊고 그 곳 커피를 거부하게 되었는지 정확한 시일이나 동기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짐작컨대 작년 말 즈음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을 자세히 접하고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목도하게 되면서부터 스타벅스를 악마와도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 같다. 스타벅스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공시킨 신화의 주인공인 하워드 슐츠 회장은 오늘날 과격 시오니스트 중 대표적인 인물로 대두되고 있다. 그는 공공연히 아랍인들을 비하하거나 테러리스트라고 매도하는 발언을 공식석상에서 내뱉었고, 실제로 스타벅스를 통해 벌어들인 돈은 이스라엘의 군수산업 강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정보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아랍 언론인 알바와바닷컴은 스타벅스가 이스라엘 군인 단체인 ‘볼 포 이스라엘(bowl 4 Israel)’을 후원하고 있다고 비난한 바 있다. 또한 하워드 회장이 수상한 “이스라엘 건국 50주년 공로상”은 바로 팔레스타인에서의 제닌 학살을 주도한 모파즈가 회장으로 있으며, 결국 이 기금은 이스라엘과 미국, 유럽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이스라엘의 무기박람회를 후원하는데 쓰였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들은, 내가 무심코 지불하는 커피 값이 축적될수록 팔레스타인인들의 억압과 고통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관계를 각성하게 만들었다. 가만 보면 현대인들은 이미 주체성을 상실한 종속적인 소비 패턴 속에서 커피를 사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이 결국에는 중동지역에서의 극단적인 희비를 낳는 야만적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종속이라는 점이 매우 경악스럽게 보였다. 그마저도 심각한 ‘이미지의 오류’를 겪고 있다는 인식에 나는 더욱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이미지의 오류란 이런 것이다. ‘스타벅스’ 하면 대개 도시적이면서 개방적이고 아늑한 이미지로써 사람들의 감성을 휘어잡고 있다. 하지만 흔히 ‘이미지’라는 것이 실체를 가리는 수단으로 이용되듯, 스타벅스의 실체에 기반하고 있는 진실의 이미지란 팔레스타인에서 시오니즘 부흥과 동시에 한 세기가 넘도록 벌어지고 있는 바로 이스라엘의 학살과 착취가 아닌가?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인권을 짓밟는 이스라엘의 식민주의

팔레스타인 어린이의 해맑은 표정. 누가 저들을 죽이는가?<출처; www.palestine-forum.org>

▲ 팔레스타인 어린이의 해맑은 표정. 누가 저들을 죽이는가?<출처; www.palestine-forum.org>

그들의 식민주의는 갈수록 끔찍해지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인 고립장벽에 가두어 놓고 이동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기본이고, 오랜 세월 불법 점령과 무자비한 파괴도 모자라 매일같이 비대칭적 군사공격을 가해 ‘살아있을 권리’마저 박탈하는 일들을 벌여왔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인권유린 행위들을 스타벅스에 그대로 투영시키고 난 다음에 그곳에서 편안히 커피를 마시는 일은 웬만해선 힘들어졌다. 더욱이 하루를 멀다하고 들려오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끔찍한 범죄소식들은, 나에게는 하루 1달러가 없어 굶주리는 어느 나라의 어린이들이나, 혹은 1달러를 더 벌기 위해 커피 농장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문제보다도 더 참혹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바로 ‘살육’에 대한 양심의 고동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오늘날 부와 현대 도시생활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스타벅스는 나에겐 살육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난 더 이상 스타벅스에 가지도, 갈 수도 없게 되었다. 스타벅스 로고에 새겨진 별이 곳곳에서 밝게 빛날수록 팔레스타인인들의 평화와 인권은 명멸해 간다. 스타벅스에 저항을! 팔레스타인에 평화를!
덧붙임

지은 님은 [경계를 넘어]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