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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책 공룡트림] 어른의 덩치가 작아진다면

어린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의 설탕 두 조각』

어린이 인권을 위해 한 편생을 바친 야누스 코르착이 이런 말을 했다.
“아이와 어른이 다른 점, 그것은 단 하나!”라고.

그 ‘단 하나’는 무얼까. 보통은 너무도 당연하게 성숙과 미성숙, 경험의 많고 적음을 판단기준으로 삼게 된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어린이는 한없이 순수하고 맑은 영혼으로 그려지거나, 미성숙하여 혼자서는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존재로 규정된다. 그렇지만, 야누스 코르챡의 대답은 좀 달랐다.

“아이와 어른이 다른 점, 그것은 단 하나,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뿐입니다. 생계를 어른에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어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기존의 편견을 뒤집는 통쾌한 발언이다.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권력의 차이를 말하다니. 이것을 기준으로 볼 때, 어른은 생활세계에서 어린이보다 확실히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 돈도 정보도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어린이는 미성숙하거나, 경험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 이 엄청난 불평등한 권력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른의 말을 듣는다. 아니꼬워도 ‘살기 위해’서이다. 거대하고 덩치 큰 어른의 압도적인 힘은 어린이들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골칫거리가 아닐까.

이 골칫거리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좀 작게 만들어버리면.... 괜찮을까?

작아진 엄마, 아빠를 옆에 끼고 TV에서 ‘뉴스’ 대신 ‘만화영화’를 보는 장면 (『마법의 설탕 두 조각』)<br />

▲ 작아진 엄마, 아빠를 옆에 끼고 TV에서 ‘뉴스’ 대신 ‘만화영화’를 보는 장면 (『마법의 설탕 두 조각』)



『모모』로 잘 알려진 미하엘엔데의 『마법의 설탕 두 조각』(소년한길, 2001)에는 부모의 몸을 작게 만들어 버린 아이가 등장한다. 이름은 렝케. 렝케는 아이스크림을 마음껏 먹을 수 없게 하고, 바다에 놀라고 싶다고 하면 굳이 산으로 가는 부모들에게 지쳤다. 그리하여 결국,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요정을 찾아가게 되고,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묘약인 “마법의 설탕 두 조각”을 받게 된다.

“설탕을 먹은 다음부터는 부모님이 네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마다 원래의 키에서 절반으로 줄어들게 될 거야.”

우리에게 익숙한 ‘마법’은 주로 소원성취와 관련되어 있다. 마법의 요술램프 속 지니는 주인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준다. 그런데, 여기서 렝케가 원한 것은 아이스크림을 마음껏 먹는다거나,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게 하는 일차적 욕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차적 욕구를 해결을 가로막는 부모에 대한 불만이 더 컸다. “나 혼자 두 사람을 상대하려니까 너무 힘들어요.”, “더구나 나보다 키도 훨씬 커요.” 라고 토로한다. 결국, 요정이 부모의 몸을 줄이는 마법을 선물해 준 것은 “나보다 키가 작으면, 둘이라도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지는 않을 텐데.” 라고 하는 렝케의 선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권력관계의 위치를 변경해 버리는 것. 링케가 원하던 소원은 바로 그것이었다.

일본의 아동문학평론가 우에노료는 어린이들은 이런 “어른의 왜소화”를 즐긴다고 말한다(『현대 어린이문학』). 1960,70년대 일본에서 12세 어린이가 어른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식을 올리는 이야기 (영화, 『작은 사랑의 멜로디』), 공부만 강요하는 부모의 뇌를 빼내고 된장을 채워 넣으니 놀이를 권장하는 부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 (만화, 『똥이나 먹어라』) 등이 어린이를 열광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지닌 어른을 부정하고, 결국 어른과 어린이의 입장을 바꿔 내는 ‘어른의 왜소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우에노료는 주장한다. 어린이의 현실에서 어른만큼 막강한 권력은 없는 것이다.

렝케의 부모 역시 ‘어른의 왜소화’를 겪는다. 결국 고양이에 쫓기는 쥐 신세만큼 작아졌다. 렝케의 장난감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고, 휴지로 옷을 만들어 입고, 억지로 만화 영화를 본다. 급기야 진열장 안에 부처상, 유리공, 황금말과 다를 바 없이 전시된다. 렝케보다 조금 작기 만한 것이 아니라, 장난감과처럼 작아졌다. 렝케는 부모를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됐다. 랭케가 부모보다 더 커지는 마법이 아니라, 부모가 랭케보다 더 작아지는 마법이 된 것에는 큰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보인다. 랭케의 크기는 변하지 않음으로써 생활 세계를 살아 갈 수 있지만, 부모는 크기가 작아짐으로써 생활 세계의 장악 능력을 현저히 잃어버린다. 아이들은 여기에서 만족감을 느낀다. 자기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작아짐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권력을 잃게 되는 모양을 보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부모의 가치를 인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전락시켜 ‘어른의 왜소화’를 즐긴 작품도 있다. 『금붕어 2마리와 아빠를 바꾼 날』(닐 게이먼, 소금창고, 2002)에는 금붕어 두 마리에 아빠를 팔아 버린 아이가 나온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단지 금붕어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신, 여기에서 아빠는 시종일관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온다. 신문을 가림 막으로 하여 아빠와 아이는 소통이 없는 관계로 묘사된다. 이런 장면 속에서 아빠는 하나의 인격체보다는, 하나의 사물처럼 느껴진다. 마지막에 아빠를 다시 찾아오긴 하지만 사물화된 아빠의 존재가 다시 인격을 가진 존재로 변화되지는 않는다. 아빠는 끝까지 신문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반면에, 『마법의 설탕 두 조각』은 전환점이 생긴다. 어느 날 랭케가 열쇠도 없이 밖에 나와 노는 바람에 문이 잠기고만 것이다. 렝케는 이제 엄마아빠가 작아지는 놀이도 재미없어지고, 오히려 부모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요정을 만나, 엄마아빠가 설탕을 먹기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단, 렝케가 그 설탕을 먹어야 한다. 렝케는 시간을 되돌려 놓고, 설탕을 먹고, 얌전해졌다. 부모의 말을 거역하면 작아지기 때문이다. 설탕 먹지 말라고 해도, ‘네’, 뉴스를 보겠다고 해도 ‘네’, 몸에 좋은 차를 마시자고 해도 ‘네’ “그 날 이후부터 집안은 아주 평온” 했다. 오히려 부모가 이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된다. “네가 좀 이상해진 것 같아.” 결국, “아주 가끔이라도 말을 안 듣겠다고 하면 안 되겠니.”라며 랭케에게 애원했다. 렝케는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사실을 털어 놓았다. 하지만, 부모는 반문한다. 설탕이 이제 모두 소화되어 마법의 효력을 잃었을 것이라고! 렝케는 두 눈을 꼭 감고 부모의 명령을 거역해 본다. “싫어요. 싫단 말이에요. 지금은 재주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마법의 설탕 두 조각』은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두에선 어린이의 입장에서 어른에 대해 통쾌한 ‘복수극’을 펼치지만, 그것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은 것으로 보면 그렇다. 힘의 위계가 바뀌어도 그 안에 내재된 폭력성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분명, 누군가는 요구만 하고 누군가는 듣기만 해야 하는 명령과 복종의 관계는 겉으로 보기엔 ‘평온’하지만, 뭔가 ‘이상’한 것임엔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런 도덕률에 따라 이야기가 다소 ‘평온’하게 마무리 된 것은 좀 서운하다. 자유롭게 날아오르던 날개가 다시 붙들려 잡힌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나도 내 ‘요구’가 있어, ‘복종’하지 않아도 괜찮아……. 라고 하는 맥락이 더 크고 자유롭게 퍼져 울릴 수 있길 간절히 바래본다. 수면 아래 꼭꼭 눌러 놓았던 억압이 툭 터져 올라 자유롭게 떠다닐 수 있도록!

덧붙임

이선주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