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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폭력에 노출된 채 갈 곳 없는 사람들

[기획]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④

옆집에서 부부싸움이 크게 나 아내가 구타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러다 말겠지' 내지는 '맞을 짓을 했겠지'라고 생각해 버리곤 잠시 느꼈던 동정심마저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한 여성이 경찰에 신고해도 '집안 일이니 잘 해결하라'며 돌려보내기 일쑤다.

대개의 가정폭력·친족성폭력은 '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공적' 개입을 통한 해결이 드물었고 기존의 법제도 안에서도 '피해자'에 대한 일시보호는 있었으나 이들이 사회구성원으로 '독립'했을 때 삶을 꾸려갈 사회적 공간은 부재한 상황이다. '가정폭력·친족성폭력피해생존자(아래 피해생존자)'라고 통칭되는 사람들에게 '집'이라는 공간이 감옥의 철창 안보다 더 억압적이고 무서운 곳이라는 사실, 그리고 겨우 탈출했다고 해도 살 곳을 마련할 물질적 토대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이 사회에서 외면 당하고 있다.


폭력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기까지

제시카(가명) 씨는 친족성폭력피해생존자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늘 아버지가 불편하고 두려웠던 이유가 아버지로부터의 성폭력피해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학교에 진학하고 상담을 받던 중 억압된 기억들이 조금씩 천천히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집을 떠날 것이라고 가족들에게 알렸지만 오히려 가족들은 '집안망신 시킨다'며 그를 비난했다. 제시카씨는 대전YWCA의 가정폭력상담소를 거쳐 현재 한국성폭력상담소(아래 상담소)에서 운영하는 중간집 개념의 '하담'에 거주하고 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그는 "주거를 가지는 것이 권리인지 몰랐다"며 오랫동안 눈물을 보였다.

김현빈(가명) 씨는 남편의 구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온 후 갈 곳이 없었던 그는 3일 정도 친구 집에 가 있었지만, 남편이 자신을 찾을 수 있는 범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나왔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조그마한 옥탑방을 얻어 살았지만 일 년 만에 강도가 들어 성폭력을 당했다. 그 후 하루라도 맘 편히 지내기 위해 단기쉼터에서 지내기도 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모자원에도 들어갔지만, 그가 보기에 시설은 당연한 요구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상한 곳이었다. 그는 1년 정도 모자원에 살았고 현재는 아이와 함께 월세 방에 거주하고 있다.

수많은 피해생존자들은 끔찍한 기억의 저장소인 집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혹은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감히' 독립을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인간이 인간대접을 못 받는" 이 사회에서 "집을 나갈 생각을 많이 했지만 용기도 없었고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도 몰랐다"는 제시카씨의 고백은 모든 피해생존자들의 고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파하는 부분이 뭔지도 모르면서…"

2004년 현재, 한 해 평균 가정폭력상담이 9만 건이지만 가정폭력피해생존자 일시보호시설의 연중평균보호인원은 400명 가량이며 성폭력상담은 3만 건이지만 보호자 현황은 400명도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대기시간도 몇 개월에서 몇 년까지 걸리는데다가 까다로운 입소조건을 요구해 '차라리' 포기하는 피해생존자들도 있다. 어렵게 시설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김현빈씨는 단기쉼터와 모자원에서의 생활이 결코 피해생존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경제적 자립을 도와준다던 시설에서는 정기적으로 있는 행사에 참여할 것을 강요했고, 사생활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하면 나가라고 했다. "나는 마치 시스템이 잘 운영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피해생존자들이) 가장 아파하는 부분이 뭔지도 모르면서 운영하고 있어요"라고 비판했다.

그에 비하면 제시카씨가 거주하고 있는 하담의 생활은 좋은 편이다. 하담은 단기보호시설의 단점, 즉 획일화된 주거환경과 생활패턴을 지양하고 성폭력피해생존자들이 경제적 독립과 정서적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주거공간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1년을 지낸 제시카씨는 하담생활이 대체로 만족스럽지만 어려운 부분이 없지는 않다고 한다. "이곳에서 세대차이도 있고 갈등도 있어요. 자립공동체라는 면 때문에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 사람이 나가거나 다툼이 있거나 그런 문제들도 있어요."라고 지적한다.

상담소에서 1년째 일하고 있는 원사는 "(쉼터나 중간집에서) 원하지 않는데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 그분들한테 또 다른 과제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며 "어떤 분한테는 여러 명이 (공간을) 나누는 공동체가 필요하지만, 어떤 분한테는 혼자 살 수 있는 주거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응급조치'가 아닌 인간답게 살 권리를 위한 주거

피해생존자들은 폭력으로부터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누릴 새도 없이 빈곤문제와 함께 '혼자 사는 여성'이 겪어야 할 어려움까지 떠 안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이 사회에서는 독립적인 공간을 꾸리려는 여성들의 희망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모순적이게도 자신이 스스로 '살 수 있는 곳'을 찾기로 결심하는 순간 '주거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게다가 주거공간이 없다는 것 자체는 재피해의 위험이 상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더 이상 응급조치 수준의 일시적인 보호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주택은 '거주'의 개념이 아니라 '소유'의 개념으로 간주되고 있어 위급한 상황을 탈출해야만 하는 피해생존자들의 설자리는 더욱 좁다. 영국·프랑스와 같은 유럽에서는 주택소유권의 여부와 관계없이 이혼 시, 자녀를 양육하는 어버이(주로 어머니)의 주거사용권을 인정하고 있다. 즉, 법원이 주거사용의 우선권을 설정할 수 있도록 한 것. 이는 남편/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모녀의 주거확보를 위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규정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폭력의 위험이 상존하는 '기존주거'로 돌아갈 수 없는 피해생존자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정부는 4월 '임대주택정책 개편방안'을 확정하면서 다가구 매입임대의 구체적인 그룹홈 확대방안으로, 장애인 그룹홈에서 요보호아동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자 등으로 그룹홈을 확대할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장기적고 안정적인 주거권 확보로 가기 위해서는 그룹홈 확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저렴한 임대주택을 제공하는 등 주거취약계층의 주거권을 보장해주는 정책의 일환으로 다루어져 확대돼야 할 것이다. 사회 전반적인 주거권 확대로 이어지지 않는 '그룹홈 개편방안'은 또 하나의 '응급조치'가 될 뿐이다.

실제로 김현빈 씨는 5년을 기다린 후에 배정 받은 임대주택을 반납한 적이 있다. 신청했던 희망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배정 받은 것. 아이의 학교도 옮겨야 하고 직장도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한 행동이었지만 담당직원은 '배불러서 그런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피해생존자들이 원하는 것이 안전하고 저렴한 주택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외의 요소를 바라는 것이 사치는 아니다. 권리를 인정하기보다는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 생각하는 국가의 태도가 정당한 요구마저 '사치'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사회적관계망 중요해

피해생존자들은 관계형성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들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것 또한 '사회적관계망'이다. 제시카씨는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는 독립적인 공간에서 사는 것이 고생하더라도 나을 것"이라면서, "관계를 통해 많은 것을 치유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 정기적인 상담이나 조정자 역할을 하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 폭력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곳, 사생활이 보장되는 곳 그리고 사회적 관계형성의 토대가 되는 바로 그런 공간이 진정한 '집'이 아닐까? 피해생존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실현할 수 있는 '집'은 상상의 공간이 아닌 현실이 되어야 한다.
덧붙임

서연희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신자유주의와 인권팀'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