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하루소식

절망을 넘어선, 평등을 향한 연대

2002년 3월 가난한 장애인 여성 최옥란 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기 몇달 전 농성을 하며 남겼던 말, "더 이상 수급자들이 자살하거나 저같이 자살을 생각하지 않도록 바뀌었으면 합니다"는 말은 유언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후에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을 절망하며 빚에 허덕이다 약을 먹었고, 고층에서 뛰어내렸고, 목을 맸다. 그리고 바로 최근인 3월 26일, 또 한명이 자신의 목에 줄을 맸다. 평택에 사는 열다섯 살 여중생 가장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노숙생활을 전전하다 객사했고, 연탄배달, 식당종업원 등으로 생계를 잇던 어머니는 뇌종양으로 쓰러졌다. 정부에서 나오는 생계비 60만원은 어머니의 치료비를 대기에도 부족했고, 빚은 자꾸 불어났다고 한다. "나는 우습게도 소녀가장이었고, 아버지도 안 계시는 불쌍한 아이였다. … 이런 나에게 … 미래가 있을까?" 일본어, 컴퓨터, 음악 등 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꿈을 허용하지 않았다. 입학금 때문에 당장 고등학교 진학조차 불투명했다고 한다. "차라리 거리의 풀 한 포기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 차라리 바람에 휘날리는 모래 한 줌으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그녀처럼 '풀 한 포기', '모래 한 줌'이길 희망하며 또 누군가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뭐든 해서, 이 앙다물고 살아야지. 죽긴 왜 죽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로는 또 있을지 모를 가난한 이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

어떤 고급아파트의 청약 기간 이틀 동안 우리나라 사회복지 예산 70%에 달하는 7조가 몰리고, 부자 5%가 우리나라 부동산의 50%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또 다른 세상이다. 어떤 사람은 일하지 않고도 수십억의 유산을 남기는데, 고된 일을 하면서도 빚을 지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게으르다 말할 수 있는가. 하루하루 먹고사는 걱정에 한숨이 늘고, 속이 곯아 끝내는 유언 한 장 남기고 가는 사람들에게 나약하다 말할 수 있는가.

경쟁과 효율만을 추구하며 불안정한 노동과 삶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이 사회가 문제다. 돈이 없어 배곯는 일, 학교 못 가는 일, 병원 못 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집세가 없어 거리를 배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가난과 불평등이 국가의 책임이고, 사회의 책임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에 맞선 사람들의 연대가 없다면, 부의 양극화를 조장하는 이 사회가 스스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개인과 가족에게만 강요되는 절망의 벽을 넘고, 인간다운 생존, 평등을 향한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