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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신윤동욱의 인권이야기

‘뻔뻔한’ 퀴어들의 두 번째 커밍아웃 “그래, 나 변태다. 어쩔래?”


뻔뻔한 호모들이 드디어 거리로 나선다. 9월 14일부터 16일까지 홍익대학교 주변에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 무지개 2001’이 바로 그 무대다. 지난 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는 “우리는 성적 취향만 다를 뿐 이성애자들과 다름없는 시민”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발칙하게도 이성애자와 다른 ‘차이’를 꺼내서 떠들고, 전시한다. 성 정체성이 다른 만큼 사는 방식도, 즐기는 문화도 다를 수밖에 없으며, 다르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아름다운 힘이라고 퀴어문화축제는 이야기한다.

퀴어(queer)는 남녀 동성애자를 포함해서 이성애 제도에서 소외된 성적 소수자들을 포함한 개념이다. 성적 소수자들을 굳이 ‘이성애’의 잣대에 따라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을 굳이 나누지 않고, 이성애제도의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퀴어로 묶는 것이다. 퀴어들은 사회가 그어 놓은 정상성의 금을 의심하며,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가로지르는 삶을 꿈꾸고 기획한다. 그 문화적 표현인 퀴어문화제는 “때론 엽기적으로, 때론 고급스럽게, 때론 급진적으로, 때론 유치하게”라는 퀴어적 감수성 안에서 “우린 행복합니다. 우린 유쾌한 퀴어입니다”라고 고백한다.

90년대 중반, 한국에서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커밍아웃한 뒤, 동성애자들은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한 싸움의 전술에서 “성적 지향성만 빼면 정상 시민”이라는 뉘앙스가 풍겨 나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더 이상 동성애자들은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차이를 덮어두고 모른 척하지 않는다. 정상성의 강박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동성애는 언제나 이성애 제도의 거울로, 그림자로 머무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차이’를 주장하는 퀴어들은 내부의 차이에 눈감지 않는다. 게이와 레즈비언의 차이를 외면하지 않고, 중산층 게이와 노동계급 게이의 차이를 인정하고, 10대 레즈비언과 성인 레즈비언 사이의 세대차이를 직시한다. 성적 소수자 내부의 차이를 덮어두면 힘있는 다수인 중산층 게이 파시즘으로 전화할 가능성이 큰 탓이다.

차이를 힘으로 여기는 차이의 정치학 반대편에는 근본주의가 버티고 있다. “고향은 어디냐?”에 따라 나뉘는 지역근본주의, “어느 학교 출신이냐”에 따른 학벌 근본주의, “몇살이냐”가 위계를 결정하는 나이 근본주의…. 한국은 어쩌면 한가지 근본주의 지배하지는 않지만, 여러 근본주의들이 암암리에 횡횡하는 사회다. 이 사회는 전근대적 잣대에 따라 갈갈이 나뉘고, 서로를 짓밟으려 한다. 이처럼 근본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다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왕따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차이가 소통을 통해 공명하고 어울림을 만들어낼 때까지, 뻔뻔한 퀴어들은 유쾌한 수다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신윤동욱 씨는 한겨레21 기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