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정재숙의 인권이야기

세밑 잡설


세밑에 '가는 세월'이란 노래를 들으며 마음이 쓰리다. 세상이 뒤숭숭해 이래서 한 잔, 저래서 한 잔. 소주도 소주지만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또 한 해가 간다는 말들 속에 가슴 저린 사람들 얼굴이 떠오른다.

'너도 나도' 거기서 예외일 수 없는 범부들이 둘러앉아 술잔을 든다. 퇴출 직장인, 남북 이산 가족, 외국인 노동자, 봉급쟁이들… '다사다난'이란 너덜너덜한 표현마저 추레해진 일년이었건만 "왜 이럴까" 속내가 편치 않은 연말이다.

신나건 참담하건 쾌해야 할 회고가 스산한 아쉬움에 잠겨야 한다는 건 슬프다. 뿌연 연기 속에 숨어버린 불투명한 세월에 심사가 틀린다. 재미있게 살아도 아쉬울 이 판에 "이 땅에서 이러고 사는 게 무섭다"는 이웃들 얘기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이러지 말자고 잔을 털어넣지만, 무섭다.

돌아보면 일은 많았다. 2000년은 대한민국에게 위대한 연대였다. 아마도 역사는 굵은 활자로 이 해를 기록하고 해석하리라. 하지만 '우리는 어디 있었나' 한심해진다. 노숙자들은 다시 거리로 나서고 부모 잃은 아이들은 보호소로 넘겨진다. 남북이 만나고, 노벨평화상을 탄 대통령이 탄생했다는데 남한은 여전히 아득한 과거에 머물러 있다. 해방 뒤 50여년 지속돼 온 남한일 뿐이라는 이 낭패감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닐니리 맘보'로 갈짓자를 걷는 나라 사정은 소갈머리 좁은 사람 복장 타기 딱 좋은 꼴이다. 가난하고 억눌린 살림도 때로 멋이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오래 계속돼 온 이 '무시'는 참는 게 대수가 아니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은 언제나 이러했던 것일까, 멍청이처럼 답답하다.

올해는 그 어느해보다 남한 '인권'이 국제적으로 용을 썼으나 참패한 한해로 기록됐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청산해야 했던 노근리나 매향리나 소파협정이나 베트남 참전문제, 일본과의 해묵은 과제였던 성노예 문제가 흐지부지 '유감'이란 시시껄렁한 상투어로 다시 관 뚜껑을 닫았다. 국제 문제가 이러했다치면, 국내 문제 또한 시원한 건 없었다. 구조조정과 개혁이란 두 마디에 휘둘린 서민들 생활이 무참하게 부서져갈 때도 아무도 다시 책임있는 말 한마디 못했다. 바른 말이 너무나 귀해진 세상에 의인 또한 얼굴을 감추고 말았으니 하늘은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은 참 웃기는 나라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구시렁거리며 욕설을 털어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건 세월이 불러온 자연현상이라 해도 무섭고 슬프다. 중얼중얼 입 속에서만 맴도는 한탄이 느는 사회는 좋은 나라가 될 수 없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며 욕지기만 늘었다 한탄하는 참에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참 가지가지다" 허허 웃은 친구따라 이 무지근한 세밑 잡설을 스스로 틀어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