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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시평> 정신


글쓰기를 시작한지 이제 2년인데 글쓰기도 기술인지라 여전히 글쓰기가 느린 편이다. 나도 몇 년 더 쓰면 남들처럼 빨라질 거라 생각해 보지만 7매 짜리 칼럼 준비에 한 주 이상 소비하는 홍세화나 원고를 써놓고 한두 매를 줄이느라 날밤을 새우는 서준식을 보면 글쓰기 속도는 성품과 더욱 관련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아르바이트 삼아 대기업 사보 같은 데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끼적이곤 했지만 해가 바뀌면서 원고 청탁을 거의 사절하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 내 생각을 낯모르는 독자들에 전하는 일을 좀더 진지하게 구성하려면 원고량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여기저기 글을 내놓고 인터뷰에 대담에 심지어 방송까지 심심찮게 얼굴을 내미는 사람들을 보면 참 희한해 보인다. 저 사람은 언제 생각하고 언제 고민하는 걸까 싶다. 내 경우 원고를 줄이는 일 외에 방송은 아예 안 하는 걸로 하고 있다. 방송사 가서 터무니없는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피디들과 상종하는 일도 싫고, 대개의 경우 방송에서 할 수 있는 얘기란 지나치게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방송을 빼고라면 모든 얘기의 맥락이 편집에 의해 최종 결정된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나는 도무지 방송에 나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김어준은 그런 나를 '역오버'라 놀리지만 나로선 다른 도리가 없다.

지식인이란 한 사회의 정신세계를 담당하는 사람들이라던데, 이 나라 지식인 사회엔 연예인 지망 지식인들만 차고 넘칠 뿐 '정신'이 없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주임검사였던 강신욱이라는 이가 대법관이 된다고 하는데 지식인 사회에서 어떤 유익한 연대 발언도 없다. 외롭게 떠드는 사람들은 당시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다. 지난해 미국 아카데미 수상식 풍경이 생각난다. 53년 메카시 선풍 때 동료 영화인들의 명단을 넘긴 엘리아 카잔이 공로상을 받으러 입장하자 자리에 앉은 후배 영화인들 가운데 절반이 기립하지 않았다. 머리통 속에 돈과 섹스만 가득차 보이는 할리우드 영화인들이 말이다.

연예인들이 그 정도니 지식인들이 어떨까는 쉽게 추정이 간다. 지구상에서 가장 상스러운 나라 미국을 가장 강한 나라로 만드는 힘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니라 바로 그런 정신일 것이다. 우리를 지탱하는 정신은 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여전히 극우의 우산 밑을 벗어나지 않는 우파지식인들. 극우와 우파조차 분별 못하면서 맨날 자본주의 이후만 외치는 좌파지식인들. 파시스트의 주구를 인권의 최후 보루 대법관에 앉히는 2000년 대한민국에 과연 정신은 존재하는가.

김규항 (아웃사이더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