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기고> 엄혜진 씨의 '제주인권학술회의를 다녀와서'에 대하여

이 글은 지난 3월 4일자 <인권하루소식> 2면에 실렸던 엄혜진(국제연대 정책정보센터) 씨의 기고문 '제주 인권학술회의를 다녀와서'에 대한 정영선 씨의 반론입니다.


엄혜진씨의 글을 읽고 한동안 고민한 끝에 무거운 마음으로, 어쩌면 더 무거운 마음으로 침묵하고 있을 인권회의 참가자 다수의 의견을 묻는 마음으로, 그리고 인권 논의의 참다운 방향을 한번쯤 점검해야 된다는 심정으로 몇 가지 이의를 제기해 본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면, 엄씨의 보고서는 일면 수긍이 가지만 상당 부분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본다. <인권하루소식>에 게재된 엄씨 보고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중요한 부분인 '대자보 논쟁'에 관한 이야기가 마치 회의 전 기간을 통하여 전체 남성 대 여성이 '여성인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은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데 있다.

이제 공론화의 정상 궤도에 올라야할 인권 논의의 활성화를 위해서, 그리고 이를 위한 계기의 장이었던 새해 벽두의 제주도 인권학술회의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면서 아쉬움을 가지고 다음의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해 본다.


가해자 인권은 건너 뛰기식 이해의 산물

첫째, 베트남 참전 한국군의 양민학살을 보고한 당시 발제자의 진실된 의도는 '건너 뛰기'(?)를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에게 의해 상당히 왜곡되고 말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발제자는 베트남 참전 한국군은 가해자가 아니라 불행한 역사(이데올로기 및 독재정부가 잉태한)가 낳은 '피해자'임을 수 차례에 걸쳐 역설한 바 있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심지어 보충발언에서조차 "내가 당시 참전 한국군이었더라도 상부의 명령에 따라서 총을 쏘았을 것..." 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지 않았던가?

회의 중에 즉석 발언을 했던 제주지역 베트남전 참전군인회장이 밝힌 '그들의 입장'에도 참석자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전군인들 개개인이 마치 '가해자'인 것처럼 '가해자 인권' 운운하는 것은 발제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언어의 횡포라고 본다.


대자보 논쟁, 정말 즐거웠나?

둘째, 대자보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두 남성의 실언(?)은 마땅히 공개적으로 사과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궁색한 변명과 묵비권으로 일관한 점은 일단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수 차례에 걸쳐 계속적으로 같은 내용의 대자보 문화(?)를 이용해서 인권회의 전 일정을 경직케 만든 일부 페미니스트들에게도 공동 책임이 있다.

하물며 대자보를 넘어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진 '인권하루소식'에 진실이 왜곡된 기사를 내보내는 것은 자칫 '인권문제의 공론화' 과정 자체의 존립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고 본다.

엄씨는 기고문에서 "젊은 여성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남성 참가자들의 이러한 일상적 반인권 행위나 의식에 내재한 위계문화에 대한 항의성 대자보를 붙이는 '즐거운 반란'이 시작"되었다고 자평하고 있다. 과연 대다수가 즐거웠을까?


차이와 다름은 선발기준과 무관

셋째, 엄씨의 기고문 중에는 "특별히 '선발된' 100여명의 학자와 활동가들 간의 의식수준의 차이가 예상외로 커서 사실 좀 선별의 기준에 대해 의아"라는 부분이 있는데 납득이 안가는 부분이다.

발제문 중에는 주제의 이론적 배경 등을 제시한 후 논점을 전개하는 식의 논문식 구성과 사례 중심의 쟁점에 곧바로 진입하는 보고서식의 글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차이'와 '다름'이 '인권'이라는 대주제로 통합되면서 나름대로의 의의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곧바로 '의식수준의 차이' 및 '선별의 기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만한 것인지 오히려 '의아'하다.


일방적 공격 유감

마지막으로, 상당수의 남성 참가자들은 '전체 남성'을 싸잡아 폄하해 버리는 몇몇 대자보의 글에 그리 기분이 좋았을 리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칫 대자보 논쟁에 휘말리면 '인권회의' 자체의 의미를 실추시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자보에 반박문을 쓰는 사람은 다행히(?) 없었다.

대자보 사건은 '불붙은 논쟁' 아닌 '일방적 공격'으로 끝났던 것이다. 특히 엄씨가 위안을 받았던 '풀뿌리 민주주의'의 여성만의 소모임엔 '남성 절대 사절'이라는 문구를 삽입시켜 남성들의 언로를 아예 막아버리지 않았던가?

진정한 여성인권 운동은 무조건 '전체 남성'과의 '전쟁'이 아니라 남성우월주의를 배태하고 있는 제도적 모순과 그에 대한 타도, 그리고 여권 신장을 가로막는 반인권적인 일부 남성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 동안 핍박 받은 여성에 대한 한풀이로 인권회의에 참석한 남성들이 '며칠 동안만이라도' 위축되고 소외되어 살아가라는 식의 논리가 과연 설득력을 가질 수가 있을까?

본 글에 대한 제주 인권회의 참석자들의 허심탄회한 질책을 기대한다.


정영선(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