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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18개 단체 인권활동가 34인이 7일간의 단식투쟁을 마치며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김대중 대통령님.

따사로운 봄 햇살 아래 개나리꽃 활짝 피고 거리를 오가는 젊은이들의 옷차림도 경쾌한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우리는 무거운 겨울옷을 걸치며 7일 동안의 단식투쟁을 감행했습니다.

정치인들의 밀실흥정 끝에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인권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던 바로 그 날 이후 우리는 분노와 실망을 되씹으며 단식투쟁을 결심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쓸모 있는 국가인권기구의 실현을 바라던 우리의 노력이 정치인들의 책략에 허망하게도 유린당한 그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분명 자신을 희생하는 투쟁뿐이었습니다.


실망감에 휩싸이면서,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오는 분노를 느끼면서, 우리는 대통령께서 그 어려운 선거에 승리하셨던 감동적인 날을 떠올리곤 합니다.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겠다"던 그 약속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군사정권에 의하여 처참한 고난을 받은 분의 입에서 울려 나왔기에 그저 '말'이 아닌 '약속'일 수가 있었습니다.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는 인권 부재의 어두운 시대를 오랫동안 겪어야 했던 우리 국민에게 바로 희망 그 자체였으며, 인권 피해자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아 살아가는 우리 인권활동가들에게 새 시대의 예감 바로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감히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날의 감동은 환상이었다고. 그 날의 약속은 거짓이었다고. 그날의 희망은 부질없는 꿈이었다고. 그 날의 예감은 착각이었다고….

국가인권기구 설립논의가 희망의 색깔에서 실망의 색깔로, 실망의 색깔에서 다시 분노의 색깔로 변해온 지난 1년간은 바로 당신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 실망으로 변하고 그리고 다시 분노로 변하는 과정에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공안검사 출신인 법무부 장관의 온갖 모략과 억지와 고집 속에서 빚어진 이른바 '인권법'안이 바로 당신이 주재하는 국무회의를 통과하는 순간 우리는 늠름했던 대통령께서 실은 무기력하고도 무능한 분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에 대하여 처음으로 치미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진정 믿고 계십니까? 대통령께서 직접 주재하신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그 허약하고 비뚤어진 이른바 '국민인권위원회'가 실제로 수많은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소외된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진정 믿고 계십니까? 우리는 이제 대통령께서 이 사회를 인권대통령 답게 '개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 버린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인권을 사랑하는 우리 젊은 인권활동가들이 이제 당신을 '인권대통령'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된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대통령님.

언젠가 당신이 다른 아무 것도 아닌 "인권대통령으로 남고 싶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우리는 감히 말씀 드립니다. 지금 당신은 분명히 '인권대통령'으로 남을 자격이 없습니다.
인권개혁의 완강한 걸림돌 박상천 법무장관을 두둔하는 당신은 '인권대통령'으로 남을 자격이 없으며, 독립적이고도 실효성 있는 국가인권기구를 설립할 강한 의지가 없는 당신은 '인권대통령'으로 남을 자격이 없습니다.


대통령님! 박상천 법무부 장관을 해임하십시오. 그 악독했던 군사정권 시절의 법무부 장관들과 별반 차별성도 없는 박상천 법무부 장관을 지금이라도 해임하십시오. 그리고 지난 3월 30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인권법'안을 누구보다도 먼저 당신 스스로의 손으로 철회하십시오. 그리하여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 인권활동가들로 하여금 당신을 '인권대통령'이라고 부르게 해주십시오.

김대중 대통령님.
우리 젊은 인권활동가들은 인권을 사랑합니다. 우리의 인권에 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우리 젊은 인권활동가들은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인권 피해자들과 함께 숨을 쉽니다. 그 수많은 피해자들은 우리와 함께 숨을 쉽니다. 우리 젊은 인권활동가들은 이 땅의 인권운동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 전통에서 힘과 용기를 길어 올립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힘과 용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국민들과 함께 올바른 국가인권기구를 만들기 위해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올바른 국가인권기구를 세우고야 말 것입니다.

1999년 4월 13일
명동성당에서 단식투쟁을 마치며

18개 단체 인권활동가 연합단식농성단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