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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시평> 원칙과 개념에 대하여


현장 인권운동가들이 생생한 현장의 감으로 ‘시평’을 써야 한다는 인권하루소식 기자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시평을 쓴 게 벌써 네번째다. 열독률이 높은 하루소식에 시평을 쓰는 것은 공중파방송 9시 뉴스에 얼굴을 들이미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들다. 텔레비전에 얼굴 한번 비치는 것은 사람들도 금방 잊고, 대개 한두마디 하고 말기 때문에 ‘너 텔레비전에서 봤어’ 하고 끝나지만, 각 단체들로, 언론사로 관심있는 개인들에게 발송되는 이 팩스신문은 나중에 영인본으로까지 제작되는 부담이 있다. 이곳 저곳 방송이건 잡지 기고든 하루소식 시평만큼의 반응은 없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 누군가 내 생각을 읽고 있다는 것은 목소리를 낮추고, 말수를 줄이면 되는 다른 만남과는 그 시작부터 다르다. 잔뜩 위축되고 긴장된다. 긴장된다고 글이 잘 써지는 것은 아니다. 긴장도가 높아져도 글은 제멋대로 제 갈 길을 간다. 환장할 노릇이다. 시평에 대한 부담을 토로하며 원고지 세장을 메웠다.

시평을 처음 쓸 때는 김대중씨가 막 대통령이 되었을 때였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헛갈리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 운동이 원칙만 잘 부여잡고 가면 된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원칙에 있다는 내용을 쓰고 싶었고, 대충 쓰고 싶은 바는 표현했었다.

대학 초급학년 시절에 자고 나면 생각이 바뀌는 사람처럼 이런 책을 읽으면 이런 생각을 지니게 되고, 저런 생각의 책을 읽으면 또 그렇게 되곤 했던 기억이 있다. 민족해방운동사를 읽으면 NL이 되고, 사회구성체에 대한 짧은 글만 읽어도 PD가 되곤 했던 그때처럼 요즘 원칙이니 개념이니 하는 것들은 방에 켜 놓은 촛불처럼 바람이 부는 대로 제멋대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도통 뭔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말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여럿이 모여 술판을 벌이는 것도 부담스럽다.

7월 1일 법무부가 발표한 ‘전향제 폐지, 준법서약제 도입’에 대해 인권단체들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한 단체 안에서도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는데,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인권단체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었지만, 한 선배가 상대적으로 만만한 내게 화를 내며 내뱉은 한마디가 맴돈다. “그건 인권운동도 뭐도 아니야.” 생각의 차이는 대충 이런 것이었다. 준법서약제를 도입한 것이 양심수들을 많이 풀어주기 위한 석방용 고육지책인가, 아니면 확대· 변형된 사상전향제로서 고착시키려는 감금용인가, 준법서약제에 문제가 있다면 당장 문제제기를 통해 쟁점화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8.15 대사면 이후로 시기를 미뤄야 하는가. 이는 전부 나름의 원칙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견해가 충돌한 것이다.

얼마전 양심수 석방을 위한 어떤 모임에서는 준법서약제에 대한 입장차이 때문에 퇴장사태까지 벌어졌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원칙과 견해가 다르더라도 끝까지 다른 견해도 경청해야 한다는 원칙이 보기 좋게 충돌했던 이날 사태는 대충 수습이 되긴 했지만, 글쎄...원칙은 언제나 새로운 원칙과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 선배와는 충분한 대화를 갖고 약간의 차이보다 더 큰 공통점(大同小異)을 찾을 수 있어서 별 문제될 게 없었지만, 준법서약문제로 인권단체들이 모여 벌인 토론은 합의로 이어지지 않았다. 서로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나름의 원칙과 인권에 대한 개념을 부여잡고 벌이는 토론은 아름다웠고, 나도 한쪽의 의견을 대변하며 고군분투하였지만, 저녁도 거른 채 늦은 밤까지 진행된 토론, 맥주 한잔의 뒷풀이도 없는 토론은 왠지 허전했다.

겨우 넉달전 인권운동이란 것은 ‘원칙’만 잘 부여잡으면 된다고 잘난 체 했지만, 그 원칙이 오히려 부담스러움과 공허함으로 나를 자극한다.

준법서약제를 둘러싼 입장의 차이는 결국 ‘지금 당장 양심수를 풀어내는 일’과 ‘표현의 자유에 저촉되는 제도의 출범을 막는 일’에 대한 의견의 차이이지만, 실상 이번 일 말고도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는 원칙과 개념을 훼손하고 살아가나를 생각하면 끔찍하기까지 하다. 운동가의 품성과 향기를 말하고, 인권침해자들과 단호한 싸움을 벼르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처럼 방에 초 한자루 켜 놓고 물끄러미 쳐다보면, 온통 자신없는 것뿐이다. 세상에 도대체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향기를 느끼게 했는가. 남에게는 단호했지만,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자신을 발견하고 그 추함에 몸서리친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오 8,20)며 지사연(志士然)했지만, 기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마태오 7,3)했던 거다

사실 인권단체들이 준법서약제를 갖고 문제제기하는 것도 초라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숱한 일반 형사사건 피의자들이 기소유예 등을 조건으로 준법각서를 쓰고 있었는데도 우리는 그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양심수들의 인권이 일반 형사범들의 인권보다 더 소중하기라도 한 것처럼.


오창익(천주교 인권위원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