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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시평> 국가기념일 지정과 정략적 사면논의

지난 토요일 광주에 다녀왔다. 새로 단장된 망월동 묘역에서 처음으로 열린 5·18민중항쟁 희생자 추모제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새 묘역에서 성대한 기념식을 올리긴 했지만 광주는 별다른 기쁨이 없는 듯하다. '구국의 결단'이 내란의 결의로 단죄되고 '반란폭도'가 민주투사로 바뀐 오늘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그래도 광주에는 거리마다 플래카드가 걸려있고 갖가지 행사가 개최되고 있지만 서울에는 아예 5·18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흔적마저 없다. 공식행사는 커녕 그 흔한 플래카드 하나 볼 수 없는 것이다.


올해도 광주만의 행사

대통령의 특별법제정 지시가 있었던 95년 11월 24일에도 환호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거리는 조용하기만 했다. 마땅히 환영할 일이긴 한데 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지배적이었다. 뭔지 도깨비 방망이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 후 약 2주간 어지러운 공방이 벌어졌다. 헌법소원이 전격 취하되었으며 특별수사본부가 차려졌다. 전두환의 골목길 저항이 있었으며 새벽암송과 전격 구속이 뒤따랐다.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개명했고 총리가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국민회의와 꼬마민주당은 조금도 공조하지 않았고 특별법 제정의 주도권은 어처구니없게도 민자당과 검찰이 쥐게 되었다. 그 결과 특별법은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진상규명·형사처벌·명예회복·집단배상·정신계승이라는 5대원칙은 특별법 어디에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진실규명위원회도, 특별검사도, 기념재단도 채택되지 않았다. 더욱이 그 후의 경과를 보면 특별법제정을 의미 있게 하는 과거청산과 민주개혁의 정치는 완전히 실종되었다.

오히려 노동법 개정의 뜻이 흐려지고 안기부법이 과거로 되돌아가는 등 민주후퇴가 있었다. 더욱이 금년 들어서는 한보사태가 불거지고 김현철 비리가 폭로되면서 정권과 국가 모두 휘청거리고 있다.


알맹이 빠진 5·18 특별법

정치적으로 왜곡되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이런 상태에서 5·18에 대한 사법처리를 진행하였으니 그 결과가 신통할 리가 없다. 가장 문제되는 것은 5·18 쿠데타에 대한 총체적 진실규명이 미흡했다는 점이다.

우선 진상규명의 대상기간이 5월 17일에서 5월 27일까지의 열흘 간으로 국한되었다. 그것도 군인들의 학살, 기타 잔혹한 인권유린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신군부의 반란과 내란행위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었다. 그 결과 5·18 민중항쟁을 과잉진압한 동기와 과정에 대해서조차 자세한 내용이 밝혀진 것이 없다. 또한 삼청교육대 만행이나 언론인 해직 등 그 후 내란을 성공으로 이끌 목적으로 저질러진 각종 인권유린행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공식적 진상규명 노력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자행된 5, 6공 치하에서의 중대인권침해에 대해서도 공식적 과거청산작업이 전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남아있는 것은 다만 80년의 신군부 실세 여남은 명에 대한 형사처벌일 뿐인데 그나마 정략적 사면론이 횡행하고 있어 언제 물거품이 될 지 모르는 상황이다.


집권세력들 자기사면 요구

답답하다. 5·18재판은 본격적 과거청산의 계기가 되지 못한 채 과거청산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대부분 건재를 자랑하고 있는 당시의 내란집권세력들은 이런 입장에서 틈만 나면 전, 노씨에 대한 조기사면을 주장한다. 뻔뻔스럽게도 자기사면을 요구하는 셈이다.

이들은 국민화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조건 사면해야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하지만 국민화해를 위해서라면 마땅히 장기수들과 양심수들부터 사면해야 맞다. 전, 노씨의 사죄를 조건으로 사면해야한다는 주장도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가해자가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바란다고 해서 사면해야 한다면 징역살 죄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진정 사죄하고 참회하는 자를 확인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따라서 사죄와 참회는 사면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본격적 과거 청산과 과감한 민주개혁을 통해 과거 내란정권의 집권여파를 깨끗이 정리하는 것, 이것이 사면의 충분조건이다. 그 전에 운위되는 사면은 사법의 권위를 우롱하는 것은 물론 5·18을 국가기념일이 아닌 지역기념일로 고착시킬 뿐으로 결단코 허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곽노현(방송대 법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