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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시평> 물신적 재벌승계를 규제해야 인권이 살아난다


물신(物神)의 힘을 제어해야 인권이 살아난다는 주장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물신으로 군림하는 재벌을 민주적으로 규제하는 일은 인권운동으로서도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최근에야 언론보도를 타기 시작한 삼성재벌의 변칙승계사실에 접하게 되면서 한국의 재벌이 이름 값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물신중의 물신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 인권운동이 전노 재판과 노동악법 철폐, 그리고 안기부법 개악반대 투쟁에 몰두하고 있던 지난 1년여의 기간동안 보란 듯이 진행된 삼성그룹의 물신승계과정은 이렇다.


삼성그룹, 총수승계 작업 완료

95년 12월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외아들 이재용 씨에게 총수자리 승계를 위해 필요한 작업을 개시한다. 이를 위해 우선 그는 이재용 씨에게 60억8천만 원을 증여하고 이중 16억 원을 증여세로 낸다. 남은 44억8천만 원으로 그는 이재용 씨로 하여금 에스원, 엔지니어링등 비상장계열사의 주식을 각각 23억원, 19억 원 어치씩 취득하게 한다. 에스원과 엔지니어링은 이후 한두달 사이에 상장된다. 이재용 씨는 상장 후 주가가 최고로 오른 시점에서 보유 주식을 처분하여 각각 3백65억 원과 2백30억 원의 시세차익을 남긴다. 그 결과 최초 증여액 45억 원은 96년말 경 이미 6백5억 원으로 불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 정도 재산은 이재용 씨를 개인적으로 부자로 만들 수는 있어도 그룹총수로 만들지는 못한다. 그룹총수가 되기 위해서는 삼성전자, 중앙개발,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 핵심계열사의 지배주식을 취득해야 한다.

따라서 이건희 회장은 우선 삼성전자와 중앙개발로 하여금 전환사채를 발행하게 해서 이재용 씨로 하여금 이를 인수시킨다. 각각 4백50억 원과 97억 원이 들었다. 97년 초의 일이다.

그 결과 이재용 씨는 현재 중앙개발의 주식 62.5%와 삼성전자의 주식 1% 가까이 보유하게 되었다. 중앙개발은 용인의 에버랜드와 몇 개의 골프장 등을 소유한 국내최대의 부동산 회사로서 순자산가치가 적어도 2조원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62.5% 지분을 보유한 이재용 씨는 1조원 이상의 부를 순식간에 챙긴 셈이다. 삼성전자의 1% 지분도 엄청난 것이다. 공개기업이긴 하지만 워낙 덩치가 커서 이건희 회장 외에는 1% 이상을 보유한 개인주주가 없다. 삼성계열사들이 20% 가까이 소유하고 있으므로 1% 지분도 삼성전자의 실질적 지배주주가 되는 데 족하다.

그밖에도 이재용 씨는 남는 돈을 이용하여 제일기획의 전환사채를 사들여 35.3% 지배주주가 되었다. 제일기획은 금년 중에 상장될 예정이므로 이재용 씨는 다시 수백억 원의 시세차익을 올릴 것이고 이 돈으로는 삼성생명의 주식을 취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해서 삼성의 재벌총수 승계작업은 이미 실질적으로 종료된 것과 다름없다.


증여세 불과 16억 원

놀랍게도 이 모든 과정에서 삼성이 들인 돈은 증여세 16억 원에 불과하다. 그나마 증여세를 낸 것도 근거자료와 변명거리를 남기기 위한 것일 뿐 법적으로 필요해서 낸 것은 아니다. 이재용씨에게 45억 원을 빌려주는 형식을 취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테니까 말이다.

삼성의 예에서 밝혀졌듯이 한국의 재벌들은 약간의 증여세만 내기만 하면 수천억원대, 아니 수조원대의 부를 순식간에 자식에게 만들어줄 수 있다. 때를 골라 몇 개 계열사를 상장시키고 전환사채를 발행하기만 하면 될 뿐 여기에 기업가적 활동이란 전혀 없다. 오직 재벌총수의 지위에 따른 권력작용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현실은 고율의 증여상속세율을 감안할 때 재벌의 분산과 해체는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해온 재벌규제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무색케 한다. 상속세는 재벌총수의 승계에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못한다. 이건희 회장만 해도 이병철 회장의 사망시 공식적으로 물려받은 순재산은 1백억 원이 채 못된다. 이 돈으로는 재벌총수의 지위는 커녕 웬만한 빌딩 하나 살 수 없다. 그렇다고 이건희 회장이 선대로부터 많은 돈을 증여받은 사실도 없다. 이병철 회장이 살아 생전에 공식적으로 납부한 증여세는 5억 원이 채 못된다. 그러니 이건희 회장이 증여받은 순재산도 5억 원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희 회장도 이재용 씨가 동원한 갖가지 편법을 동원하여 그룹총수 자리를 물려받은 셈이다. 이는 삼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총수승계경험이 있거나 총수승계를 앞두고 있는 모든 재벌에 공통적 현상으로 보아 무방하다.


국세청, 불공정행위 전면 조사해야

삼성의 사례가 드러남에 따라 재벌승계의 비밀은 적어도 반쯤은 풀렸다. 그렇다면 관계당국이 나서야 한다. 국세청은 이 과정을 전면 조사하여 이제라도 증여세를 물릴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증권감독원 역시 총수지위 승계과정에서 행해진 주식거래와 전환사채발행에 불공정한 점이 없었는 지를 조사해야 한다.

96년도에 신재벌정책의 이름으로 재벌총수와 재벌기업간의 변칙거래관계에 대한 규제의지를 세웠던 공정거래위원회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국회가 이대로 침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30대 재벌의 승계과정에 대한 청문회를 바로 열어 철저한 진상규명을 행한 후 규제입법을 서둘러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는 이상 경제정의니 정치발전이니 하는 말을 들먹거릴 수 없다. 법은 왜 있으며 관계당국은 무엇하고 있느냐는 국민의 원성이 들리지 않는가? 인권과 정의, 공동선과 사회적 책임을 유린한 재벌의 변칙승계과정을 규제하기 위한 이 일에 국민과 관계당국이 나설 것을 촉구한다.

(곽노현 : 방송대 법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