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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변 론 요 지 서(일부 게재)


죄명 : 살인 피고인 : 이형자


1.사건정황(생략)


2.사건의 경위와 정당방위(생략)


3.1심 판결에 대한 비판

가. 1심 판결은 피고인이 계속 극심한 폭행에 감정이 격앙된 나머지 살의를 일으켜 피해자가 칼날을 자기 목에 들이대는 순간에 갑자기 달려들어 두손으로 칼을 피해자의 목부분으로 밀어부쳐 그의 목부위를 찌르고, 이어 피해자가 피를 흘리면서 칼을 붙잡고 방바닥에 넘어지자 이를 빼앗아 다시 피해자의 목 뒷부분 등을 수회 찔러 사망하게 하였다고 판시하고, 변호인의 정당방위 주장을 배척하였습니다.

나. 1심 판결은 피고인의 행위가 시종일관 동일한 범의하에서 행하여졌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본 사건의 경위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판단은 나중의 결과에 맞춘 의제적인 판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 판결에 의하면 피고인이 칼을 빼앗은 것도 살의에 의한 것이 될 것이나 칼을 빼앗은 후에 피고인이 보여준 행동을 보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피고인은 칼을 빼앗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절박한 공포 속에서 피해자에게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칼을 뺏은 것일 뿐 그때까지만 해도 그 칼로 피해자를 찌르려는 의사는 전혀 없었습니다.

피고인이 처음 피해자를 떠밀어 칼에 찔리게 하였을 때 살의가 있었느냐의 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때 살의가 있었다면 피고인은 연이어 살인행위를 계속하였어야 할 것입니다.
다. 1심 판결은 피고인이 당하고 있던 위해의 상황을 과소 평가하고 있습니다.

만약 피고인이 절박한 생명의 위협 속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면 설사 피고인이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상대방에게 살의를 품었다고 하더라도 정당방위가 인정되어야 합니다.

1심 법원은 이 사건을 단순한 부부싸움의 결과로 생각하여 피해자의 폭행이 극심했더라도 피고인을 실제로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판단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날의 상황과 피해자의 태도가 여느 때와 달랐음은 위에서 누누이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또한 피해자에게 실제로 살의가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는 노릇이나 피해자의 행동과 표출한 태도가 피고인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던 이상 정당방위의 상황을 인정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라. 1심 판결은 피고인이 극심한 폭행에 시달렸으니 상대방에게 증오감을 품었을 것이고, 그 증오감이 살의를 일으켰을 것이라는 식의 추론을 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인 폭력의 구조와 그 앞에 놓인 피해자의 심리상태를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판단입니다.

어느 정도의 폭력 앞에서는 상대를 증오할 수 있으나 절대적인 폭력 앞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나약해지고 비굴해져서 증오조차 품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방위의사 속에 상대방에 대한 증오나 분노, 복수심 등의 동기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정당방위의 성립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이 판례입니다.

마. 1심 판결은 피고인이 피해자를 사망케 하지 않고서도 생명을 보호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판단이 깔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피고인이 좀더 현명하게 행동하였더라면 그러한 일이 가능하였을지도 모르나, 이는 상황을 직접 겪지 아니한 사람의 사후 평가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절박한 위기와 공포에 놓여 있던 사람이 더 현명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하여 정당방위를 부정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4. 정상

가. 남편의 가혹한 학대에 시달리다 못한 아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남편이 잠든 틈이나 술에 취한 몸을 이용하여 남편을 살해하는 사건을 한번씩 보게 됩니다. 비록 무거운 죄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가혹한 학대상황이 인정되면 오죽하면 그랬느냐 라는 동정을 받습니다.

1심 판결의 양형으로 미루어볼 때 이 사건은 어떤 사건보다도 가혹한 학대상황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이 피해자를 난자하였다는 양상 때문에 그러한 사건보다 죄질이 무겁다는 편견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비교하는 사건들이 어떻든 모살인데 비하여 이 사건은 가혹한 폭행을 당하던 중에 지극히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며, 피해자에 의하여 유발된 사건이었습니다.

만약 피해자가 구타정도로만 그쳤다면 이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처음의 부상 이후 피고인에 대한 가해의 기도를 멈추기라도 했으면 사망의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난자행위란 처음의 가해행위가 몰고 오는 엄청난 공포로 인하여 정신 없이 되풀이되는 관성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난자행위가 있었다 하여 이 사건의 죄질을 달리 본다면 이야말로 인간의 행위를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하 생략)


1993. 11.

위 피고인의 변호인 변 호 사 문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