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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다시, 잘 채워보려는 마음으로

후원인 여러분, 2026년 새해가 밝았네요. 편지 너머 여러분의 자리에서 어떻게 연말을 보내고 연초를 맞이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12월 25일부터 종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12/25부터 1/4, 자그마치 11일이 사무실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공식’적인 시간이었던 거죠. (아마 11일을 통째로 쉰 사람은 없지 않을까ㅎㅎ싶지만요…)

일단 저는 대청소를 했습니다. 집 아니고 ‘방’을요. 제 방의 가장 큰 문제는 ‘넓지 않은데 물건은 많다’는 점입니다. 꼬박 모아온 백 권 조금 넘는 책들과 아이돌 앨범들, 굿즈가 이곳저곳에서 섞여있는 혼란스러운 풍경이죠. 가령 책장 한 줄의 절반은 워커스 잡지가 있고, 나머지 절반은 앨범으로 채워져있는 식입니다. 물건이 많으면 정리라도 해야 하는데, 무엇이든 ‘몰아서 하는 것’을 선호하는 습성 때문에, 1년에 두 번가량 하루이틀 잡고 대청소를 해왔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청소만 하는 거죠. 그리고 그 하루이틀이 너무 무겁기에 자꾸만 미루게 되더라구요.

이번에는 다른 청소의 리듬을 만들어보고자, 짧게 짧게, 첫날은 청소, 둘째 날은 정리, 셋째 날은 배치로 나눠 진행해봤습니다. 가장 큰 결단은 바로 ‘정리’의 날에 안 읽는 책과 안 쓰는 카메라를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 백 권 중 절반 넘는 책, 손이 안 가는 DSLR·필름카메라와 렌즈를 정리하며 책장의 여섯 줄을 비워냈죠. ‘2025년에 내가 이걸 만진 적 있는지’라는 딱 한 가지 기준에만 따르니 정리가 쉽더라구요. 비워진 책장을 보면서 ‘내가 왜 이것들을 붙잡고 있었는지’를 잠깐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무래도 간직하고 싶던 건 그 물건들 자체라기보단 그것들을 채워놨던 그 시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사회주의 공부해보겠다고 자본론 세미나도 나가고, 한동안 정신분석이론에 꽂혀서 또래들이랑 책모임도 하고. 좋아하는 작가-황정은, 장강명, 김숨-의 저서를 모아두고. 한창 영상 공부를 하면서는 언젠간 다큐를 찍겠다! 사랑방 들어와서는 안식년에 찍겠다! 하는 호기로운 생각을 하던 그런 시절. 분명한 건 지금의 제가 그 시절의 저와는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랑방에 들어와서 활동가가 한때의 밝고 소중한 시절을 잃어가는 그런 과정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리까지 하고 드디어 배치의 시간. 사실 제가 비운 이유는 제대로 또 새롭게 채우기 위해서였거든요ㅎㅎ. 사람이 자라면 공간도 같이 자라나야 한다는 거죠. ‘그때’ 제게 소중했던 것보다 ‘지금’ 제게 필요한 물건들, 네… 바로 ‘덕질’입니다. 게다가 그 짧은 11일 동안 제게 새로운 덕질 영역이 전개되었답니다. 바로 애니메이션입니다. 원래도 애니메이션을 좋아했지만, 웬만한 여유로는 쉽게 좋아하지 않으려는 편입니다. (적어도 시즌별로) 완결이 난 애니메이션을 쉬지 않고 달리고 싶은데, 그러려면 저에게도 충분한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더라구요. 가장 마지막으로 봤던 게 8년 전쯤, 어느 배구 애니였는데 과장 조금 보태어 거의 숨만 쉬고! 밤을 새우면서 내리 보았었죠. 거기 나오는 캐릭터들의 관계성, 서사 등에 흠뻑 빠져서 다크써클은 더 내려왔지만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배구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학교 배구 경기도 보러갔던 기억이 있네요. 아무쪼록 이번 연휴에는 눈도장 찍어놨던 두 개의 애니메이션 정주행을 달렸습니다. 제 비워진 책장에는 이 애니의 원작 만화책들과 굿즈들이 또 하나씩 채워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이 칸들도 비우는 날이 올 텐데…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는데, 그런 나약한(?)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맘껏 채울 수 없겠다 싶어서 ‘일단’ 채워보는 중입니다.

이 코너가 나름 ‘활동가’의 편지이기도 하니 조금 다른 방향으로 덕질 이야기를 꺼내보자면… 덕질을 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레이더’가 같이 켜질 때가 있습니다. 가령… ‘이 뮤직비디오에 굳이 동물이 죽은 이미지를 사용해야 했을까?’ ‘화려함을 강조하기 위해 패스트패션이 쓰이는 건 불편한데.’ ‘이 캐릭터 참 매력 있게 만들려고 한 건 알겠는데 여성혐오가 깔려있어서 정이 안 붙네’ ‘이런 ‘서비스 컷’을 내가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들이 튀어오르는 거죠. 좋아하는 노래도 그 노래를 부른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거나 하면 듣기 거북해지기도 하고,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정주행을 하다가도 ‘아, 이건 아니지’ 하고 정떨어지는 순간도 종종 옵니다. 이런 고민들은 예술가와 예술작품은 깔끔하게 독립된 존재인지, ‘좋은 작품’이란 무엇인지 질문하게도 합니다. 뭐, 생각한다고 해서 답을 찾은 건 아니지만요. 사실 엄청나게 많은 작업이 쏟아지고 그걸 접할 수 있는 시대기도 하잖아요. 그 작업들이 (비록 제 취향에 딱 들어맞진 않을지라도) 한 번쯤은 즐겨볼 만한 각자의 매력이 있다고 하면, 그 작업을 만든 사람은 누구인지와 그 작업에 어떤 가치관이나 태도가 담겨있는지에 보다 집중하게 되더라구요. 쓰고 보니 참 피곤하게 덕질한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래서 에너지가 더 필요한가 봅니다. ^^;;

작년 9월, 사랑방에 새로운 이들이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사랑방에게도 엄청한 사건이지만, 저 개인적으로도 큰 사건이었거든요. 아, 지금 내가 낯선 곳에 들어온 이들을 챙기는 자리로 ‘이동’했구나! 하는 자각이죠. 연차가 가장 적은 활동가라고 실수하고 몰라도 허허… 하며 웃어넘어가거나 자기위로만 할 순 없겠구나. (물론 원래라고 그럴 수 있던 건 아닙니다) 아아, 좋은 시절이여! 위치 변화에 따라 기존 활동가들에게도 새로운 미션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9월 첫날 출근하면서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친절하게 인사하자 다들 빵 터지며 애쓴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새삼 제가 처음 출근했던 2022년, 다른 상임활동가들도 이렇게 마음이 분주했겠구나 싶습니다. 그렇게 요즘은 새로운 사랑방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활력에 익숙해지는 중입니다.

2026년은 새로운 사람, 새로운 취미와 함께. 또 열심히 채워온 건 더 단단히 하고, 비울 건 비우고 다시 채워보는 그런 시간으로 보내볼까 합니다. …라고 마음은 정리했는데, 몸은 아직 겨울 한가운데네요. 근래 훅 추워진 날씨에 저는 감기가 걸릴까봐 내의를 위아래 두세 겹씩 입고 다닌답니다. 후원인 여러분들도 부디 독한 감기 없이 겨울을 나실 수 있길. 그럼 건강과 평안, 그리고 투쟁과 연대가 함께하는 2026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