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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평등세상을 '함께' 앞당기는 '싸우는 존재'들

인권궐기대회 후기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급박한 시대에 ‘인권’은 배부른 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런 시대일수록 ‘인권'을 향한 간절함은 더욱 선명해지기도 한다. <세계인권선언>이 나온 1948년 12월 10일의 세상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시대는 셀 수 없이 많은 삶들이 아예 사라지거나 겨우 연명하는 데 급급해야 했던 비극적인 시대였다. 처참히 무너진 ‘삶의 존엄'과 그에 필요한 기본적인 가치들을 다시금 세우기 위한 전세계의 처절한 노력이 세계인권선언에 담겨있는 것이다. 그 이후로 75년이 흐른 2023년, 우리는 다른듯 닮은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12월 9일 열렸던 <인권궐기대회>는 지금 여기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에서 서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닮은듯 새로운 약속을 나누는 자리였다.

 

모든 회원국은 그들의 국제분쟁을 국제평화와 안전 그리고 정의를 위태롭게 하지 아니하는 방식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해결한다. 전쟁없는세상의 이용석 활동가는 세계인권선언의 시작이 “인류가 저지른 끔찍한 비극인 제2차세계대전, 즉 전쟁에 대한 반성”에 있다고 언급했다. 즉, 세계인권선언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으로부터 인류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약속”이자 “다시는 인간을, 다른 생명을, 지구를 파괴하는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다짐”이다. 그러나 전쟁의 참상은 그 이후부터 최근까지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작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기나긴 폭력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끔찍한 학살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지금 여기의 우리는 전쟁이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그래서 “전쟁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는” 구조적인 폭력임을 확인하며, 끊이지 않는 전쟁과 군사적 대립에 맞서기 위해 “전쟁과 학살, 군사적 폭력에 저항하는 이들과 연대하고, 한국사회가 전쟁에 동참하거나 연루되지 않도록” 하겠노라고 선언한다.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뒤흔드는 사건은 전쟁 뿐이 아니다. 우리 가까이 일상에서도, 꾸준히 생명이 스러지는 참사가 반복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3조를 10.29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의 자캐오 신부가 읽은 이유는, “'인권의 최일선 옹호자'이어야 할 국가와 정치”가 부재한 자리에서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처참한 사회적 참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4.16 세월호 참사라는 뼈아픈 경험에서 ‘생명’과 ‘안전’이 권리임을, 그리고 그 권리는 피해/생존자의 자리에서 되짚는 힘을 키워왔다. 그렇게 “한국사회가 심각한 사회적 상처를 입힌 존재”들은 투쟁의 “최일선”에서 권리를 세워왔다. 지금 여기의 우리는 생명과 안전을 방치/위협하는 사회에서 “공동체적 치유와 전환”의 길을 내려는 피해/생존자, 유족과 함께하기로 선언한다.

<인권궐기대회>가 끝난 바로 그 자리에서 이어진 <김용균 5주기 추모제>에서도 똑닮은 이야기가 나왔다. "더이상 일하다 죽지 않게, 안전을 차별받지 않게" "생명과 안전은 우리 모두의 기본권이다". 생명을 차별적으로 대하는 사회에서는 ‘죽어도 되는/어쩔 수 없는 목숨’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또 확산된다. ‘일터’는 그 장소 중 하나며, 김용균의 죽음은 ‘비정규직’이라는 차별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밀려나는 존재를 떠올리자면, “우리도 같은 사람, 같은 노동자”라고 외쳐온 ‘이주노동자’가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며,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명동성당투쟁 20주년 사업단의 우다야 라이는 사업주의 허락 없이 일터를 변경할 수도, 근래에는 지역이동까지 제한해가며 이주노동자로 하여금 “열악한 근로조건, 장시간 저임금 위험노동, … 사업주의 부당한 지시 따라야 하고 폭언, 폭행을 감내”하라는 “인종차별적인 고용허가제”를 고발했다.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20년 전,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를 합불법의 말에 손쉽게 가둔 정부의 사냥과 같은 단속추방으로 생명을 잃는 이주노동자가 잇따랐다. 그에 맞서 일년 넘게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투쟁을 한 이주노동자 투쟁의 역사를 지금 여기의 우리는 ‘함께’ 기억하며, “인간답게 노동자답게 살 수 있는 권리” 곧 “평등한 인권/노동권”을 쟁취하는 싸움을 ‘함께’ 이어갈 것을 선언한다.  

먹고사는 ‘생존’, 목숨을 이어갈 ‘생명’이 중요한 데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생존’과 ‘생명’ 유지하는 그 이상으로 우리는 ‘존재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워오기도 했다. 인권은 사회가 자격에 따라 할당하는 권리가 아니라, 내가 나다운 삶을 꿈꾸고 직접 만들어나갈 사회에 대한 권리였다. 충남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이진숙 활동가는 근래 충남에서 시작된 공공도서관 내 성평등 성교육 도서에 대한 퇴출 요구가 “성평등을 지지하는, 다양한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엄청난 폭력”이며, 이는 “자유롭게 읽거나 구경할 권리, 책을 통한 공감과 깨달음을 누릴 권리, 포괄적 성교육을 경험할 권리, 작가들의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는 사건이라고 폭로했다. 한편, “남편이 있는 동성애자” 소성욱/소주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족으로서 서로를 돌보며 살아왔는데도 우리더러 부부가 아니”라고 하는 한국사회를 ‘모두의 결혼’, 즉 “결혼제도를 모두가 평등하게 이용”할 수 있는 사회로 만들기 위해 사랑으로 맞서 싸우고 있다. 자기가 속한 사회의 문화 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즐기며 학문적 진보와 혜택을 공유할 권리,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에 상관없이 가족을 구성할 권리는 나다움을 지키고 또 더 넓게 존엄한 삶을 상상할 권리였다.

 

이 자리에서 선언한 모든 이들은 공통적으로 “함께, 싸울 것이다”를 말했다. 그 의미를 곱씹어본다. 모든 사람은 이 선언의 권리와 자유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체제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권달주 활동가가 읊은 세계인권선언 28조는 내게 이렇게 남았다. 모든 사람은 이 선언의 권리와 자유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체제를 꿈꾸고 또 만들어나갈 권리가 있다. 평등세상을 앞당겨온 전장연의 투쟁은 결국 차별세상에 질문을 던지며 제동을 걸어온 투쟁이었다. 누군가를 태우지 않고 떠나는/떠나도 되는 ‘차별열차’를 멈춰세우고, 느리더라고 안전하게, 누구 하나 남겨두지 않고 ‘함께’ 가는 사회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한 상상력을 지하철, 거리와 같은 장소에 퍼뜨리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함께 싸움에 나설 동료를 만나고, 만들어왔다.

그 싸움의 현장에서 집회시위의 ‘권리’를 함께 외치는 동료였던 공권력감시대응팀의 랑희 활동가는 끝내 연행되어 궐기대회에 예정된 발언을 하지 못했다. “사실 저들은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것 자체가 두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모여서 장애인권리예산 확보를, 반전평화를, 노동자의 권리를 이야기하며 평등을 외치는 게 두려운 것입니다.” 그 자리에 대신하여 선 정록 활동가의 발언은 평화적인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권력이 틀어막고 덮고자 했던 이야기와 존재”를 등장시키는 우리의 ‘권력’이기도 함을 상기시켰다. 그 경험의 일환이었던 <궐기대회>는, 평등세상으로 향하는 여전한 과정 중에 있는 ‘우리’의 가능성과 힘을 발견하는 자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