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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삶-죽음을 기억하는 사회적 애도는 시작되었다

故 변희수 하사를 추모하며, #힘을_보태어_이_변화에

“나는 그런 죽음들을 접할 때 뭔가 잃어버린 것 같아. 근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 내가 뭘 잃은 것인지 두리번거리게 돼. 내 마음의 진상조사를 하고 있다고 할까. 뭔지 잘 모르겠는 내 마음의 진상조사를 계속 하는 게 애도가 아닐까 싶어. 나는 도대체 그 사람들과 무슨 끈으로 연결돼 있는 걸까, 그걸 찾아보는 진상조사….”

인권활동가 류은숙은 사회적 참사로 인한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가 느끼는 슬픔의 의미, 타인의 죽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책임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과정을 ‘애도’라 말한다. 그리고 애도의 힘은 각자의 세상을 넘어 죽음의 이유를 찾으려는 서로가 연결되는 경험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이은용 극작가, 김기홍 퀴어 활동가에 이어 지난 3일 변희수 하사의 사망 소식을 접한 직후 슬픔과 화가 사라지지 않았다. 왜 이토록 슬픈지 혼란스럽고 잘 설명할 수 없어 외로웠다. 하지만 ‘내 마음의 진상조사’가 필요한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마음은 우리를 애도의 장소로 데려갔다.

변희수 하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그 주말동안 이루어진 추모행동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깃발과 성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책들을 펼쳤다. 광장에서 차별과 혐오를 밀어내기 위한 말들을 추모의 조각보로 잇고, 슬픔으로 분노의 말하기를 이어갔다. 거기에는 서로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 故 변희수 하사의 용기를 기억하며 변화를 만들기 위해 함께 싸우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었다. 나를 비롯해 또다시 동료를 잃은 성소수자 커뮤니티, 무엇을 잃었는지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삶-죽음을 기억하며 시작된 사회적 애도

故 변희수 하사는 군 복무 중 성전환 수술을 받았고 자신의 성별정체성과 관계없이 군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한 최초의 트랜스젠더 군인이었다. 그리고 모든 성소수자 군인들이 차별받지 않는 환경에서 군인으로서의 사명을 다 할 수 있을지 대답을 요구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를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국가는 강제전역을 결정하며 트랜스젠더 여성의 시민권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사망 이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육군은 민간인 사망 소식에 따로 입장을 낼 것은 없다고 했고, 비난 여론에 의식한 국방부는 ‘안타까운 사망’ 정도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애도한다’는 국방부의 연설은 위선, 무능과 같은 말이다. 트랜스젠더의 삶을 이해할 의지가 없는 국가에게 어떻게 트랜스젠더의 죽음을 애도할 능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국가가 응답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트랜스젠더’의 존재와 삶을 드러내며 사회적 애도에 나서고 있다. 애도는 누구의 삶과 죽음이 기억되고 슬퍼할 만한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규범 하에 이루어진다. 성소수자의 죽음은 그 자체가 아예 누락되어 언급되지 않거나, 자신의 정체성 혹은 삶대로 추모되고 기억되기 어려웠던 이유다. 그래서 성소수자의 죽음과 애도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는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인 의제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진 故 변희수 하사 추모행동은 가시적인 애도를 통해 타자에 국한된 성소수자의 위치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서로를 숨길 필요 없는 추모식은 공개적으로 애도되고 애도할 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 스스로 규정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애도는 이 사회에서 권리를 가진 시민이 누구인지를 질문하고 확장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존재 자체가 낯설고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트랜스젠더의 죽음은 이들이 어떤 차별과 폭력을 겪고 있는지 비극에 이목을 집중하게 한다. 작년과 올해 우리는 익명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의 사회구성원으로서 트랜스젠더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보다 ‘차별과 혐오의 피해자인 성소수자’로서만 기억할 때 시민의 범위는 확장되기 어렵다. 이은용, 김기홍, 변희수 세 사람이 차별과 혐오로부터 떠나기 위해 벗었던 바로 그 타자의 옷을 다시 입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삶이 던진 질문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용기를 낼 수 있는 관계

평등을 갈구했지만 죽음에 이른 이들을 기억하는 과정에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타자화의 가능성과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동일시로 인한 죄책감이 따라오기도 한다. 나 역시 故 변희수 하사의 용기와 국가의 거부라는 간극 사이에서 함께 싸우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벗어나기 어렵다. 평등이라는 이상마저 기대할 수 없는 사회일 때 죄책감에 무너지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개인과 사회가 타인의 삶의 조건을 성찰하고 부정의한 현실에 개입하려는 한, 죄책감은 사라질 수 없는 것이라는 동료의 말을 떠올린다. 중요한 것은 슬픔과 죄책감으로만 이루어진 동일시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당시 누군가는 피해여성의 죽음을 애도하며 ‘너는 나다’라는 문구를 포스트잇으로 남겼다. 그리고 성평등 없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성차별적인 한국사회를 바꾸어나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너는 나다’라는 문구는 변화의 상징이 되었다. 성차별과 노동권 침해에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막기 위해 ‘너 메갈이냐?’는 질문이 등장했을 때, ‘우리는 메갈이다’라는 선언은 성차별에 대항하는 사람들 간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타인의 죽음을 계기로 내 삶의 비극을 우선하는 것은 아닐지 경계하면서, 타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이유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차별의 구조와는 무관한 것처럼 스스로 면죄부를 주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집단적 애도와 연대의 경험을 만들어 왔다.

많은 사람들이 故 변희수 하사를 애도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성차별적 구조에서 부당해고에 맞서는 싸움, 성별 및 신체조건으로 인한 제약과 차별을 중지시키려는 싸움, 여성폭력에 맞서 ‘단 한명도 잃을 수 없다’고 외치는 싸움을 이어온 사람들의 경험은 변희수 하사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성별이분법에 기댄 차별적 질서에서 용기를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이해하는 사람들이 애도의 주체다. 그 구조에 함께 있는 이들로서, 자신의 삶과 연관지으며 故 변희수 하사의 용기를 기억하고 변화의 책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애도를 만들고 있다.

故 변희수 하사와 군인의 삶을 살았던 부대 동료들은 그의 성전환 과정과 군복무를 지지했다. 그의 삶과 용기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일상적인 관계가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경직된 군대라는 조직에서 트랜스젠더에게도 자신의 공간과 지위를 가질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도전하고 도전받는 과정 없이 저절로 관계가 변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친밀한 사적 관계에서가 아니더라도 같은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으로서 다른 사람의 삶의 조건을 이해하고, 권리를 상호인정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다. ‘시민’을 구성해온 차별적인 규범을 변화시키는 것이 우리 자신의 삶을 지속시키는 조건이라는 것을 상기할 수 있는 역량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그 기회와 역량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존재를 가시화하며 그 규범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만남을 불온한 것으로 만들고 차단하려는 시도에 맞서는 것이 사회적 애도에 포함된 다짐이기도 했다.

 

#힘을_보태어_이_변화에

50대 트랜스젠더 김비 작가는 故 변희수 하사를 추모하며 다음 생에 ‘여자’로 태어나라는 말 대신 다시 또 ‘퀴어’로 태어나서 만나자고 말했다. ‘퀴어’로 살아갈 다음 생에서 찬사를 보내고 축제를 벌이겠다는 다짐은 자격박탈로 인한 고통의 책임을 성소수자의 성별과 정체성에서 찾는 이 사회에 맞서 싸우면서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다짐으로 들렸다. 그리고 이제 나도 나의 다짐을 써내려 간다.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이 관객과 평단의 ‘인지’를 받은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던 故 이은용 작가, 성소수자의 존재가 기록으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故 김기홍 활동가, 자신도 변화에 힘을 보탤 테니 ‘용기를 내라’고 말했던 故 변희수 하사. 이들이 도전해야 했던 벽들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도 자신의 삶과 사회를 바꾸려 한 그들의 용기가 죽음으로 무효화되지 않을 방법을 찾고 싶다. 그들을 애도하면서도 그들의 용기가 특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래서 결국에는 좌절될 수밖에 없는 ‘신화’로 남겨지지 않도록.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에서 계속 이어지는 용기를 발견하고 모아갈 수 있도록. 그들이 남긴 이야기가 곁에 있는 한 힘을 보태어 만들고 싶은 변화이다.


[참고자료] 류은숙, "[인권단어장] 애도", <인권오름>, 2016년 6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