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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성공적 방역'이라는 평가 이면에 가려진 것은

방역의 시대, 무엇이 우리를 안전하게 할까

정부의 방역 지침이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로 전환되기 무섭게 지역사회 감염 확진자가 속출했다. 성급하게 코로나19의 종식 가능성을 점치거나 선언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일까. 이번 집단 감염 사태는 다시금 코로나19 이후 시대를 살아갈 우리들에게 주어진 두 가지 삶의 조건을 확인시켜준다. 하나, 코로나19 감염은 언제든 수그려들었던 고개를 들 수 있기에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둘, 행여나 확진 판정을 받게 된다면 사회적 비난에 대비해야 한다. 전자가 진실에 가깝다면, 후자는 바로잡아야 할 오류에 가깝다. 언제까지나 사회적 거리두기와 생활 속 거리두기 사이를 오갈 게 아니라면, 지금은 바이러스를 잘 관리하며 함께 살아갈 방법을 터득해야 할 때다.

‘성공적 방역’이라는 평가에 가려진 혐오와 차별

코로나19 발병 초기, 중국인 밀집 거주 지역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은 적나라했다. 많은 언론이 바이러스 최초 발원지의 이름을 딴 ‘우한 폐렴’ 이라는 명칭을 고수하며 반중 정서를 부추겼다. 이들은 차이나타운을 르포 형식으로 다룬 기사들은 중국인들을 싸잡아 비위생의 온상, 바이러스 확산의 주범으로 이미지화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야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 일각에서는 중국과의 국경을 폐쇄해야 한다는 주장이 연일 흘러나왔고, 청와대 게시판에는 중국인 전면 입국 금지 청원이 심심찮게 등장했다. 관광객이 많은 지역에서 ‘중국인 관광객 입장 금지’ 팻말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이후 2월 중순 확진자 수가 뚜렷한 하락 곡선을 그리며 ‘코로나 종식’설이 매스컴에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신천지 교단을 중심으로 바이러스 집단 감염 사태가 일어났다. 역학 조사를 통해 동선을 속인 신천지 교인이 있었음이 드러나자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방역 당국과 지자체는 허위 진술을 하는 개인에게 엄중한 조치를 내리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교단에 대한 전례 없는 전수 조사가 실시되고, 간판 없는 신천지 교회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상세하게 공개 되었다. 서울시는 교단의 법인 등록을 취소함으로서 행정상의 불이익을 주었고, 경기도는 이만희 지회장이 머물고 있다는 곳을 급습하며 이들을 ‘처단’하는데 적극 동참했다. 집단 감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교회와 같은 다중 이용 시설에서 방역 수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사회는 집단 감염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일제히 신천지에 돌렸다. 마치 바이러스가 아니라 신천지 교단 박멸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분노의 방향은 명확했다.

그리고 다시, 코로나19 확진을 받은 사람이 대거 나타났다. 한동안 공격할 곳을 잃었던 언론사들이 가장 먼저 확진자를 향한 날을 세웠다. 국민일보의 ‘단독’ 보도를 필두로 인터넷 언론과 경제지에서 일제히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는 보도를 쏟아냈다. 기사 제목에 ‘게이클럽’, ‘동성애’, ‘게이’, ‘블랙수면방’, ‘찜방’ 같은 용어를 사용하며 확진자가 다녀간 곳이 성소수자들이 이용하는 공간임을 부각했다. 코로나 확산이 개인의 성적 지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듯, 사회에 만연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낙인 논리에 날개가 돋쳤다.

지금의 방역은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일제히 호명하고 있다. 현상적으로 코로나19 감염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찍기는 중국인에서 시작해 신천지 신도를 거쳐 성소수자에 도달했다. 안전한 상태란 개인이 매사 조심해서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사회는 유독 소수자의 부주의나 실수가 마치 개인 혹은 집단의 정체성에 기인하는 것처럼 그리며 혐오와 차별의 근거를 만들어오고 있다. 과연 중국인만 아니었으면, 신천지만 아니었으면, 성소수자만 아니었으면 우리는 코로나 19로부터 안전했을까? ‘감염’이라는 공통 기반 위에 ‘소수자 정체성’이 결합하며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난무했지만, 확진자 숫자가 감소했으니 이들 집단에 대한 방역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평가할 수 있을까?

코로나 바이러스는 거짓말을 먹고 자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방역 당국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낙인은 방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인 입국 금지 청원이 한창일 때도 정부 당국은 인종 차별적인 태도는 방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마찬가지로 최근의 이태원 사태에 대해서도 당국은 공동체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멈출 것을 당부하고 나섰다. 서울시는 아웃팅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익명 검사라는 제도를 도입했고 중대본은 이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검사를 받고 있고, 확진자 증가세 역시 예상보다 빠르게 진정되는 듯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정부와 방역 당국은 감염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할 경우 강경 대응하겠다는 기조를 취한다. 일례로 최근 인천시는 이태원 클럽을 다녀온 뒤 역학조사에서 직업을 속인 학원 강사를 「감염병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위한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그는 해당 클럽에 다녀온 사실이 알려지면 졸업과 취업에 불이익이 생길 것이 두려워 거짓말을 했다고 밝혔다. 한 보수 언론은 이 상황을 두고 “코로나 바이러스는 거짓말을 먹고 자란다”고 평했다. 그 확정적인 언사에서, 해당 클럽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왜 그토록 두려운 일이 되어버렸는가에 대한 고찰은 찾을 수 없다.

지난 13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한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태원 감염 확산으로 성소수자 혐오가 급증하고, LGBT 커뮤니티가 두려움을 느끼는 상황에 대해 “한국은 성소수자 권리에 대한 ‘합의’(consensus)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했다. 권리에 대한 합의를 얻지 못한 존재는 정체성을 공공연히 밝힐 수 없는 상태, 달리 말하면 사회로부터 들켜서는 안 되는 상태에 놓인다. 그 결과 누군가 원치 않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 해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안전을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일

정부는 방역과 안전을 위해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가시적인 존재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지만, 성소수자에게 그 요구는 전혀 안전하게 들리지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면 적절한 치료를 받고 나을 수 있을지언정, 자칫 직장이나 친밀한 사회적 관계망을 잃고 엄청난 사회적 지탄을 감수하며 살아가야 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시화될 수 있는지 여부는 차별적인 사회 구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차별적인 사회 구조를 그대로 방치한 채 안전을 위해 검사받으라는 메시지만 던지니, 안전을 달성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이는 비단 성소수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문서가 없는 미등록 이주민이나 난민들이 여전히 보편적인 방역 체계에서 지워지는 현실, 재난안전지원금을 특정한 거주지를 가진 ‘세대주’에게만 지급하며 홈리스를 배제하는 문제는 국가가 차별적으로 적용하는 방역 체계의 층위를 보여주고 있다. 소수자들의 오랜 요구에도 불구하고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소수자들이 사회에서 평등하고 역동적인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책임을 국가가 오랜 세월 외면해온 탓이다. 모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할 일은 감염인 개개인에게 강경히 대응하는 게 아니라, 재난을 개인화하는 시도의 반대편에서 권리 침해를 받는 개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 맞서는 일이다.

검진을 위해 용기내지 않아도 되는 사회

지난 12일 성소수자 단체들은 ‘코로나19 성소수자 긴급 대책본부’를 출범하고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 대응, 인권침해 상담, 검진 홍보 및 독려와 더불어 방역당국과 직접 소통할 계획을 밝혔다. 긴급 대책본부는 숨죽여 있을 동료 성소수자들에게 “용기를 내어 서로를 지키자”고 호소했다. 이는 방역을 위해서 성소수자를 차별하면 안 된다는 방역 당국의 말과는 달랐다. 이들의 진심어린 걱정과 독려, 그리고 당신들이 혼자 고립되지 않도록, 혼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곁에 있겠다는 말들은 분명 적지 않은 이들에게 용기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질병을 진단받기 위해 용기까지 내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꿈꾸어 본다. 전 지구적으로 유례없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마주하며 과연 무엇이 질병으로부터 안전한 삶인가를 묻게 된다. 잠깐 스쳐도 감염될 수 있다는 바이러스 앞에 안전한 상태란 감염되지 않은 상태라기보다는, 설령 감염되더라도 혐오와 낙인에 내던져지지 않은 채 적절한 의료 접근권을 보장받고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상태에 가까울 것이다. 만일 그러한 사회라면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일이 그저 한없이 두려운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사회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이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낼 재간이 없을 듯하다.